아프지만 슬프지만 기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제 자신을 ‘먼지’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죽고 한달만 지나도 모두가 저를 잊을꺼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잊혀질꺼라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없지만 형의 말에 의하면 제가 막 한글을 뗐을 무렵에 방구석 벽 귀퉁이에 이런 글을 써놓았다고 했습니다.
“엄마아빠 제발 싸우지마세요.”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는 아주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그 흔한 술,여자,도박 중 어느것도 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소처럼 일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8남매 중 장남이라는 무게와 조금만 수틀리면 식음을 전폐하고 죽겠다는 퍼포먼스를 하시는 분의 아들로써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그 퍼포먼스를 할 때 마다 아버지는 일하고 받은 돈을 할머니에게 가져다드렸고, 어머니는 뒤집어졌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집사람이 가져다주지 말래요” 라는 말을 하셨고 어머니의 지옥이 시작 되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쌍욕을 다 알고 계신 듯한 할머니의 끊이지 않는 욕설……
그 욕설을 들으며 자라서인지 마찬가지로 찰지게 욕을 잘하는 막내고모는 아버지와 스무살 차이, 어머니와도 열다섯살 차이가 났었습니다.
할머니를 비롯해 아버지의 바로 밑 동생부터 막내동생까지 모든 동생들이 돌아가며 어머니를 욕하고 괴롭혔습니다.
아버지 동생들 7명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어머니를 주저 앉혀 놓고 세상의 모든 욕을 쏟아내던 그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산으로 도망치셨습니다.
할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온다고 할 때마다 산으로 가서 오질 않으셨고 어머니는 그 고통을 혼자 감내 하셔야 했습니다.
“난 정말 그만 살고 싶다.” 라는 말씀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죽을까봐, 도망갈까봐, 누가 데리고 갈까봐, 그냥 홀연히 사라질까봐……
다른 집들은 아들 타령을 하면서 딸들을 괴롭힌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앉혀놓고 딸 타령을 하셨습니다.
“넌 아들이어서 내 마음을 몰라……
난 혼자야.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저는 시장도 잘 따라다니고,
심부름도 잘 다니고,
음식 하실 때 옆에서 도우며,
딸이 있었으면 도와줬을꺼라고 이야기 하는 것들 중 제가 아들이어도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 어떤 고민이 있어도 이야기 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폭력을 심하게 당하고 있어도 어머니에게 말씀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주 작은 고통 하나만 더해도 어머니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감당해야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려야 하는 것이 저의 몫이라는 것을, 절대로 고통을 더해드리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 어린나이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새끼는 언젠가 내가 칼로 찔러 죽일꺼야!”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저도 모르게 문득 뱉은 그 한마디……
저도 놀랐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그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그런 제가 싫었고, 제 인생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세살 터울의 형이 한명 있었지만 제 인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차갑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듯한 사람, 옆에서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
특유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내게 닿고 나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것은 괴롭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함께 놀면서도 긴장해야 했던 사람……
형이 없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형이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형들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방원 처럼 우리가 형들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았습니다.
형만 없어도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유난히 눈이 동그랗고 유난히 까맸습니다.
부모님도 굳이 따지자면 까만 편에 속한 분들이었지만 모든 어른들이 “넌 대체 누굴 닮은거냐?” 라고 물을 정도로 저는 유난히 까맸습니다.
“네가 그렇게 까만 이유는 아버지가 돈 벌러 케냐에 가셨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왔기 때문이야.”
어머니아버지가 농으로 하신 이 이야기를 저는 오랫동안 실제로 믿었습니다.
크면 돈 벌어서 케냐로 돌아가 생부와 생모를 찾을꺼라는 생각을 했고, 때로는 그런 나 때문에 부모님이 더 괴로우신거고, 그런 나이기에 형이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글짓기를 하는 날 저는 케냐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을 적었고, 선생님은 어머니를 불러 제가 입양아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저를 불러앉혀놓고 농담으로 한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들었냐며 “넌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다.” 라고 말씀해주셨고 저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생의 비밀은 밝혀졌지만 그래도 제 별명은 케냐 였습니다.
삼촌들도 친구들도 저를 계속 그렇게 불렀었고 저는 어머니가 성급히 주워 담으신 그 말을 가끔은 의심하며 살곤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코 밑이 심하게 거뭇거뭇 해졌습니다.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면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습니다.
“너 내일 면도 하고 와서 검사 받아”
어느날 국어시간에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제게 난데 없는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너무 어색했고 저는 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너 내가 면도하고 검사 받으랬지.
내일까지 꼭 하고 와.”
그 선생님은 집요하게 저를 붙잡고 재차 주문을 하셨고 저는 역시 면도를 하지 않은 채 학교에 갔고 국어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내 말을 무시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네 수염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알아?
그래 좋아. 면도하기 싫으면 하지 마.
대신 네 이름은 오늘부터 이진오가 아니라 이혐오다. 알겠냐?
네 이름은 이제 혐오야.”
그날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저는 쭉 혐오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선생님은 복도에서 저를 만날 때 마다 “오~ 혐오~ 오늘도 참 혐오스럽구나~” 라고 말씀 하셨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일진들에게는 선생이 공식적으로 혐오라고 부르는 저를 타겟팅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싸움을 잘하는 학교로 정말 유명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터 ‘학교깨기’를 하러 다니는 일진들의 가방모찌 였다보니 그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일대의 초등학교를 다 평정하고 지역 전체를 먹었다며 좋아하던 일진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처음 봤던 것도 그 직후 였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무서운 아저씨들이 학교 앞에서 지역을 평정한 일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장면을 아직도 입을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아원 하나가 있었는데 일진도 그곳 출신이었고, 그 무서운 아저씨들도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네,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 맞습니다.
제가 자란 동네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중3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학교 일진들이 라이벌 관계였던 옆 학교에게 졸업기념으로 마지막 대결을 벌이자며 10명씩 선수를 뽑아 무지개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통첩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때 신문 1면에 학교가 소개 된 것을 처음 봤습니다.
한명이 죽고 세명이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전국적으로 대서특필 되었고 그때의 사진 속 장면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 되었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무기들이 책상 위에 주르륵 놓여 있고 그 전쟁에 참여한 아이들이 쭉 서 있는 그 모습은 조폭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졸업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살벌한 가운데 자습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이! 체육선생, 이리로 좀 올라와.”
체육시간에 운동장으로 가기 전 집합하는 장소는 교장실 바로 밑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집합할 때면 창문 앞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권위적인 모습은 정말 위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교장선생님 목소리는 한층 더 위압적이었고 체육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부리나케 뛰어 올라갔습니다.
“짝!…… 짝!…… 짝!……”
교장선생님이 체육선생님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온 운동장에 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필이면 창문 가까이에서 때리는 바람에 그 모습은 그곳에 집합해 있던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졌고 여기저기에서 “씨발 X됐다.” 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빨개진채 내려온 체육선생님은 우리를 세워놓고 한명한명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체육복이 지저분하다며 뺨을 때리고, 두발이 단정하지 않다며 뺨을 때리고, 똑바로 서 있지 않다며 뺨을 때리고,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모두 어깨동무를 시킨 채로 운동장을 계속 오리걸음으로 걷게 했습니다.
팔짱을 낀 채 그 장면을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그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예전에 ‘두사부일체’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역명문고라 불리우는 학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가득한지 보여주는 영화 였는데 그것을 보면서 ‘어? 우리 학교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 약했습니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지역에서 서울대학교를 제일 많이 보내는 곳이라고 유명한 학교, 동시에 지역의 모든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던 학교, 툭하면 심각한 성폭행 사건을 일으키는 학교, 심심치 않게 교장이 교사를 때리는 장면을 보게 되는 학교, 쉬는 시간에 교사들은 교실 근처에 오질 않고 교실 안은 파이터클럽이 되는게 일상이었던 학교……
저의 가장 친했던 친구 두명 중 하나는 자꾸 괴롭히는 일진을 때려눕혔다가 여러명에게 린치를 당해 오랫동안 입원 했다가 전학을 갔습니다.
또 한명의 친구는 저와 한창 플라모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느때와 다름 없이 우리 머리를 툭툭 치며 괴롭히는 아이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때 흐르던 피와 제게 튄 핏방울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갑자기 모든 장면이 슬로우비디오 처럼 느려졌습니다.
제 친구는 집에서 가져온 아버지의 등산칼을 계속 휘두르고 있었고 그 칼을 빼앗으려던 일진들이 여기저기 베이고 있었습니다.
배를 찔린 녀석은 쓰러진채 배를 부여잡고 있었고 그 손가락 사이에서는 피가 꿀럭꿀럭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칼이 내동댕이 쳐지고 제 친구는 끌려가고 칼에 찔린 일진은 병원으로 가고 저는 여기저기 흩뿌려진 피를 걸레로 닦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은 절대로 새어나가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는 전학처리, 칼에 찔린 녀석은 가벼운 정학……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모든 사건사고는 조용히 묻혔습니다.
그리고 학교 컴퓨터실에는 새로운 컴퓨터가 놓였습니다.
교실 안이 매일 같이 난리법썩인데도 묵묵히 앉아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더 무서웠습니다.
다음 시험에서 한문제만 더 틀리면 부모님이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꺼라 말하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서울대를 가지 못하고 연세대나 고려대에 가게 되었다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아이들도 생각납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에게 맞고, 형에게 맞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맞고, 일진에게 맞고,
동네북으로 인생을 사는 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 큰 어른이, 명색이 선생인데 학생들 보는 앞에서 교장에게 따귀를 맞는 선생님들 기분은 어떨까……
돈 많은 학부모들에게 굽실 거리는 교장의 기분은 어떨까……
일진인 자식이 친 사고를 무마하려고 여기저기에 돈을 뿌려대는 부모의 기분은 어떨까……
학교는 제게 또다른 의미로 학교의 본분을 다한 것 같습니다.
교과서 내용을 제 머릿속에 집어 넣는 것은 실패 했지만 인생이 얼마나 지옥인지는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지옥이 언제까지 끝나지 않는지도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꺼라고 그러니 사랑을 포기하고 살자고 계속 되뇌임으로 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되뇌이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어릴 적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영향인지 크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최선을 다해서 대쉬를 하고 최선을 다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은 뒤, “너도 언젠가는 날 떠날꺼야.” 라는 말을 자꾸 꺼내며 저의 불안을 내비쳤습니다.
제가 상처를 줘놓고 상대방이 화를 내면 “거봐…. 너도 마찬가지지…..” 라고 이야기 했고, 화를 내지 않으면 더 큰 상처를 주고 “너도 결국 날 떠날꺼지?” 라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결국 떠나는 그들 뒤에서 가슴을 부여 잡고 역시 날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며 통곡을 하는…… 저는 그렇게 삐뚤어진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앞에서 죽고 싶다고 허구언날 되뇌이는 어머니 때문에 상처를 받아놓고, 저는 아내 앞에서 허구언날 죽고 싶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상실감을 잘 알면서 저는 그 상실감을 아무 죄 없는 아내에게 전가했습니다.
저는 정말 별로인 남자였습니다.
어쩌면 아내는 남자 고르는 눈이 최악이었던 것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저는 부모님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도 만날 때 마다 부둥켜 안고, 아버지의 볼에 입맞춤을 할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불평불만이 많으신 어머니의 대화상대도 몇시간씩이고 해드리고 어머니를 만나면 최대한 많이 안고 있으려고 손을 잡고 있으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아끼고 있고, 보살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내 딸,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6년 전 한국에 돌아온 뒤 새벽녘에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교문에 손을 대고 한참을 기도한 뒤 돌아왔습니다.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복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복수를 할꺼라고 다짐 했습니다.
당신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으로……
당신들이 가져보지 못한 최고의 가정을 만드는 것으로……
당신들이 만들지 못한 최고의 학교를 만드는 것으로……
두 아이를 언스쿨링으로 키우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곤 합니다.
대단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스쿨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가르칠 것도 많지 않고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게 훨씬 많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 안에 아로새겨져 있는 ‘폭력의 기억’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히스테리의 기억’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대물림 되지 않도록……
제 안의 그 짐승을 죽이고 또 죽이고 다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몇번 회초리를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했지만 사실 아빠의 감정이 실려 있었음을, 폭력의 기억을 잠재우지 못하고 대물림 했던 것임을 고백하며 엎드려 울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매년 그때를 이야기 하며 다시 무릎을 꿇고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들 눈동자 속의 저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무서운 아빠에서 불쌍한 아빠로 바뀌어갔고 아이들의 눈은 저를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스러움으로 바라봐주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의 그 짐승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치며 기도 했는지 모릅니다.
감사하게도 그 가슴을 아내가 쓰다듬어 주었고 아이들이 등을 쓸어주며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울지마……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울지마…… 아빠는 좋은 사람이야……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제게 상처를 준 사람들 모두 부모님에게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슴에도 상처들이 가득한데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그저 덮어두고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모님에게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지옥이어도 견뎌낼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가 건강한 사랑을 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삐뚤어진 사랑을 대물림 해줄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최초의 인간을 원망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신을 원망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제 원망도 거의 희석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한걸음 더 물러서서 인생을 바라봤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디폴트값을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것을 무척 속상해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괴로워 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고 자신의 역량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인생의 디폴트값은 지옥이었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인생은 원래 지옥이었습니다.
그 지옥 속에서 아주 작은 기쁨이 피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날 괴롭히는게 당연한데 그 가운데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스쳐지나간 사람이 감사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품어준 사람이 감사한 것이고,
부족하기 그지 없는 나에게 잠깐이라도 기대를 걸어줬던 사람들도 감사한 것이고,
이리 부족한 남편을 데리고 살아주시는 아내가 너무나 감사한 것이고,
이리 부족한 아빠에게서 태어나준 아이들이 너무나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제 인생은 지옥인데 군데군데 꽃밭이 있었습니다.
한걸음 자리를 옮겨 그 꽃밭에 서서 감사함으로 누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산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제 회색빛 삶이 초록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안의 그 짐승도 강아지 만한 크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인생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세상에 그만한 개소리도 찾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만큼 맞는 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맞지만 그 마음을 먹는다는게 지옥을 뚫고 올라오는 것 만큼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지옥을 뚫고 올라오고자 할 때 그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
시시각각 변하는 지옥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그 가운데 피어올라 있는 꽃밭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그 꽃밭을 어떻게 누리는지……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 주어진 사람들을 여럿 욕심 내지 않고,
딱 한명씩만 더해 나가는 것……
마지막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누구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고, 누구나 꽃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꽃밭을 가꾸듯 내 인생에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성심성의껏 가꾸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진리가 종착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용케도 그 길을 잘 찾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페이지 한페이지 곰씹어가며 잘 읽어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하지 않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감사한 시간동안 딱 하나의 꽃을 더 심어보려고 합니다.
욕심 내지 않고 딱 하나만 더 심어보려고 합니다.
제이든 / 슈퍼제너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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