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을 읽고……
1. “대체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던 거에요?
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 또래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이 안되는데…..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낸 거에요?”
30대 초반 무렵……
좋은 인연으로 만나 친구처럼 지내고 있던 60대 중반의 대기업 사장님과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던 자리였다.
편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 뒤 였는데 갑자기 사모님께서 그런 말을 불쑥 꺼내셨다.
그런데 뭔가가 가슴 속에서 울컥 하는게 느껴졌다.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시는 사모님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가까스로 달래야만 했다.
2. 난 비슷한 나이 또래와 속 편하게 인생을 이야기 하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일 이야기를 나눌 때도, 함께 술마시고 춤을 추며 놀 때도, 나의 일부분이 뚝 떨어져서 그들과 어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항상 공허했고 그런 나의 답답한 표정과 부담스러운 시선은 함께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 사회에서 만난 형들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싸가지 없다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난 여러차례 그들과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수 밖에……
그 자리에서 함께 놀고 있으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뭔가 한심한 사람들을 쳐다보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 적 없었다고 부정했었지만……
내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내 몇년 뒤에도 저 사람들처럼 여기에서 이렇게 부어라 마셔라 술로 인생을 달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은 가졌던 것 같다.
보기와는 달리 술이 약한 내가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그 감정도 덩달아 올라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내 표정에 비추는 것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3. 좋은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철학적 질문들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단순하게 “인생 뭐 있어? 마셔!” 라고 외치지 못하는 복잡한 내 자신이 싫었지만 그 질문들은 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남들이 부러워 하는 실적을 내고 큰 돈을 벌게 되어 그것을 축하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 술자리에서도 갑작스럽게 ‘이제 그냥 죽을까?’ 라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기도 했었다.
사는게 재미가 없었다.
몸뚱아리가 너무 튼튼한건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꿈에 그리던 과로사는 커녕 코피 한번 나질 않았고 나를 보고 박수 치는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었고 그 박수 소리는 나를 더 허무함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4. 20대, 30대, 40대와 인생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너무 가볍기만 하거나, 인생 전체가 돈독이 올라 있는 듯한 기분, 온갖 걱정으로만 가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분들이랑 대화를 나누면 뭔가 좀 달랐다.
50~60대는 되어야 좀 말이 통했고 인생에 대해 별의 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좋았을 뿐이었고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나이 차가 꽤 나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 대해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분들도 “이렇게 우리랑 놀아주는 젊은 친구가 어디 있어?” 라며 좋아하셨고 오랫동안 알아온 맛집들로 나를 데려가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내 친구“라고 소개하시곤 했다.
그게 싫지 않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울렸었다.
그날 그 사모님께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픽 하고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그분이 후벼 파낸 것만 같았다.
너무 반가우면서 동시에 너무 당혹스러웠고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자리를 파한 뒤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아내도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금은 의아해하는 듯 싶었다.
그냥 불편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절대로 그 감정은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자 그렇게 엉뚱한 결론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5. 그 무렵은 막 중국으로 건너갈 무렵이었고 중국에 가서는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어차피 하나가 될 수 없는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중국에서는 그렇게 자주 허무함이 몰려오진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크기의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 시절에 제일 컸던게 홍대에 있었던 수노래방이었는데 건물크기도 방의 크기도 족히 10배 이상이 되는 것 같았다.
중국친구에게 왜 이렇게 큰 방이 필요하냐고 물어봤더니 20명 넘는 일가 식구들이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을 해왔다.
너무 황당한 말이어서 재차 묻자 할아버지할머니와 그 자녀들과 손주들이 모두 함께 오는 노래방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래방 안에 그 세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음료와 음식 메뉴가 있고 편의점과 아이스크림 매대까지 있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칠순잔치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광경…….
삼대에 걸쳐진 일가가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하는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광경은 여전히 내 인생에 가장 부러운 광경으로 자리 하고 있다.
6. 결혼을 하고 나면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다.
엄청나게 행복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달라진게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바빠진 것 밖에 없었다.
그냥 일 때문에 바쁘고, 아이 때문에 바빠서 생각할 시간조차 없게 되는게 인생인걸까 싶었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계속 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하나의 인생인데 누군가는 가진 것과 상관 없이 화목함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누군가는 내가 전혀 느껴본 적이 없는 행복감에 가득찬 미소를 머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을 계속 흔들고 있었다.
남의 인생과 내 인생을 비교하지 말라고 했는데 통제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뭐가 문제여서, 뭐가 달라서 내게는 그런 인생이 허락 되지 않는 것인지 미칠 듯이 궁금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나 역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과 자기 인생을 비교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의 인생과 내 인생을 미친듯이 비교했던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비교를 하며 한탄을 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결/원인/이유를 탐구하며 내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지 끊임 없이 질문하고 도전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7. ”어머니, 아버지와 두분이 이혼하시면 안되요?“
내가 이 말을 처음 꺼냈을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리고 난 그 이후로 평생 그말을 꺼냈었다.
거의 매년이었을꺼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그 말씀을 건넸다.
“너희 때문에 안된다.” 라고 말씀 하시는 어머니께 “부모가 이혼하고도 잘 크는 경우도 많데요. 아니 오히려 부부싸움을 계속 지켜보며 살도록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혼하는게 더 낫데요” 라고 말씀을 드렸을 정도로 초등학생 시절에 부모님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혼란스러웠고 피폐했고 답답했고 상황이 종결되길 바랬다.
그 어린 아이에 서점에 가서 결혼에 대한 책을 뒤적거리며 이혼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서 어머니를 붙잡고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으로 혀를 찰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 가정은 다른 친구들의 가정에 비해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아버지가 노름을 하거나 술담배를 하시는 것도 아니었고 두집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를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소처럼 열심히 일만 하시며 번 돈은 몽땅 어머니에게 드리는 분이었고 집과 땅의 명의까지도 어머니께 드리는 분이었다.
다만 지금은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괴팍하고 무식하고 폭압적이고 저질스러운 성질과 행동을 아버지가 막아주시지 못했던 것이, 그걸 그대로 닮은 동생들이 어머니를 못잡아먹어서 난리법썩을 떠는 걸 막아주시지 못했던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잘못이었다.
난 그런 비겁한 아버지가 싫었다.
내 여자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허구언날 울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불쌍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심하게 원망하기도 했었다.
심리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이후에 어머니의 신경증이 일찍부터 심했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병약하고 겁이 많았던 어머니의 성격이 하필 그런 시어머니를 만나서 나쁜 방향으로 폭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버지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단 한끼를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고, 초등학생 나이부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셨어야 했다.
한창 하고 싶은게 많았을 그 어린나이부터 장남으로써 형제들을 위해 하루 종일 몸사리지 않고 죽을 고생을 해야 했던 불쌍한 인생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소의 우생을 사신 것과 같은 아버지에게 그 이상의 지혜로움과 결단력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난 그때 비로소 부모님 두분을 가슴 깊이 용서할 수 있었다.
지옥 같았던 내 청소년시절을 보호해주지 못했던 것도 두분의 지옥을 간신히 버티시느라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8.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악습을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 그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인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형제라는 천륜을 감정적으로 끊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 뿌리를 흔드는 것이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 나는 각오했다.
내가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는 순간, 내 유전자 속에 있는 각종 문제들과 내가 보고 듣고 느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든 악습들에 이 아이들을 공격하고 지옥에 빠뜨리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만 했다.
나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면 차라리 일찍 이혼하고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돈만 벌어 보내거나, 일찍 죽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슬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 자신을 발전시켜나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아내와의 갈등은 모든 각오와 다짐을 무너뜨렸다.
난 거울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단점만을 모은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고 아버지도 하지 않으셨던 바람을 피우고 아이들을 때리기까지 하는 엉망진창의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9. “다 그렇게 사는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잔뜩 있었다.
함께 술마시고 함께 바람 피우고 다니며 애는 원래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람들은 잔뜩 있었다.
그들을 최대한 멀리 하면서 종교시설에 가봐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술과 여자와 폭력을 신앙의 힘으로 참고 있다는 느낌일 뿐, 부부사이가 정말 좋거나 자녀를 정말 사랑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안의 수많은 갈등들…….
가족들 모르게 저지른 나의 잘못들이 대한 끝없는 죄책감…..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키를 잡고 있다는 부담스러운 책임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냥 누가 와서 깔끔하게 날 좀 죽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움과 고통이 나를 짓이기고 있었다.
웃긴 것은 그랬던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주변에서 가장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였다는 점이다.
심적 갈등과 죄책감과 책임감에 못이겨서 하게 되는 행동 만으로도 난 상당히 그럴 듯한 평가를 받고 있었고 난 그런 현실이 더 지옥 같이 느껴졌다.
10. “우리 이대로면…. 언젠가는 이혼하겠죠?”
라는 것에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단 몇가지 빼놓고는 전부 달랐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도 가득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너무나 달랐고 우리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으려고 노력할 수록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다른 가정에 비하자면 섞으려는 노력을 멈췄느냐 계속 이어가고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결국 신앙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 부부가 각기 갖고 있는 자존심과 자신감은 절대 서로에게 무릎 꿇을 수 없는 수준의 아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 신앙이 서로에게 무릎을 꿇으라니까 서로에게 무릎 꿇었다.
신앙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딱 한가지…..
무릎을 꿇려준 것 밖에 없다.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지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 그러면서 얼마나 잘난 줄 알고 똑똑한 줄 알고 강한 척 하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줬을 뿐이고 그 진실 앞에서 우리는 무릎이 꿇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나도 그런 아내가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상처가 가득하면서도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고 있던, 결국 속에서는 상처가 곪을대로 곪아 터져 있던 불쌍한 인간들이었다.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나니 다른 말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보듬고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밖에……
우리는 놀이터에서 만나 처음으로 모래장난을 시작하는 아이들처럼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함께 하기 시작했고 서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11. 내년이면 결혼 20년 차……
초반의 10년은 어떻게 버텼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매해가 아니 매순간이 신혼이었고 우리의 황금기였다.
우리는 함께 지옥을 뚫고 올라와 천국에 이른 동료로써 동지로써 동반자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숙일 수 있는 한 최대한 깊이 고개를 숙이고……
두 무릎을 꿇은채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정말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저께 아내가 침대에 누우며 한 말이다.
어안이 벙벙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여러번 있었지만 아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는 아내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테니 당신은 나에 대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책한권 써놓고 아이들에게 남겨놓고 죽으세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어 넘겼지만 그 말을 하는 아내의 촉촉한 눈빛이 지금의 행복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끝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고민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계속 울부짖어줘서 고마워요. 그 덕에 저도 관심 밖이었던 그 주제에 관심 갖게 되었고 한걸음 한걸음씩 더 알게 되고 살아가게 되고 그만큼 사랑하게 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아내의 고백이 나를 또 울렸다.
12. 알려고 자꾸 노력해야 알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자꾸 길을 뚫어봐야 길이 난다.
자꾸 맞춰보려고 시도해야 함께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이 진리이고 섭리이다.
안되는 건 없다.
될때까지 하면 누구나 닿을 수 있고 누구나 이룰 수 있다.
될때까지 그 오랜시간 동안 험난할 수 있는 길을 내 앞에 있는 사람과 걸어갈 것인지 말것인지만 결정하면 된다.
누구와 걷든 그 길을 걷겠다고 결단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면,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말자고 합심하여 걷는다면 그 과정의 험난함도 온갖 의미로 가득할 것이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그린 인생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자극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애초에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라면 그 길이 좀 더 쉬울 것이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매력이 가득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 길이 좀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다 그놈이 그놈이다.“
쉽기만 한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두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고 큰 도전이다.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은 어쩌면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을 일찍 포기해버린 사람의 인생이 어떤지, 그것을 제멋대로의 방법으로 이뤄내려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누구나 다다를 수 있지만 아무나 다다를 수는 없는 세계에 도달을 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엄청난 선물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권하고 싶다.
꼭 누군가와 그 길을 걸어보라고……
결혼이라는 이벤트와 문서적인 행위를 하든 하지 않든 그런 사랑을 꼭 해보라고……
13. 나는 무엇을 공부하든 그것을 먼저 공부한 선배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궁금했다.
그 공부가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실질적인 영향이 궁금했고 ‘삶이 변한 사람들’과 ‘삶이 (더 긍정적인 쪽으로) 계속 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토록 찾아다녔건만 그런 선배는 단 몇명 밖에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그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나의 마음은 항상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혀 무산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후반생을 살고 계신 선배님들이 이처럼 지구 어딘가에 살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들이 느끼고 있을 행복이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행복일꺼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 맛을 누리며 70대 넘도록 인생을 살았다니 상상만 해도 황홀한 듯 하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맛을 봤으면 좋겠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자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선물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 가정들끼리 모여서 이야기 나누며 늙고 싶다.
그런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또 그 어려운 길을 걸어가며 그 맛을 알아가고 그 놀라움을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쁨이 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가는 기적’이 널리널리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걷는 길이 좋은 씨앗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제이든 / 슈퍼제너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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