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가는 자기 관상을 볼 줄 모른다.
※ 이 글에는 영화 <관상>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면 #1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정재)은 칼을 들이대며 관상가 내경(송강호)에게 자신이 왕이 될 상인지 묻는다.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는 내경을 향해 수양대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얼굴이 묘한거 아니냐며, 천하의 관상쟁이가 대답을 못한다는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경에게 접근한다. 수양대군은 내경의 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어찌...빨리 결정해야 되지 않겠나.
이미 왕이 되어버린 다음에는 너무 늦을 테니 말일세...
장면 #2
영화 <관상>의 다른 장면, 한명회의 계략을 앞세워 역모에 성공한 수양대군. 내경을 살려주는 대신 내경의 아들 진형을 활로 직접 쏴 죽인다. 진형을 죽인 뒤 멀어지면서 수양대군은 중얼거린다.
저 자는 자기 아들이 저리 절명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려나? 난 몰랐네만...
이 두 장면을 보면 수양대군은 관상을 믿기보다 오히려 이용하려는 사람이다. 관상을 믿지 않는다는 건 주어진 운영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원래대로라면 오를 수 없는 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답게 자신의 운명을 직접 만드는 수양대군은 관상가의 말을 믿기보다 자신의 칼을 믿었고 결국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직업상 회사 대표님이나 팀장님들을 사석에서 볼 기회가 많았다. 그 때마다 신경쓰이는 말은 자신이 관상을 잘 본다는 말이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해서 면전에서 반격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반박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으니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말을 우리나라 식으로 풀어서 자신이 관상을 잘 본다고 표현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이런 표현이 별로 달갑지 않다.
우선 관상만을 보고 판단한다면 면접을 볼 필요도 없이 이력서 사진만 보면 그민이다. 면접도 오래 끌 필요 없이 그냥 얼굴 몇 초 보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관상을 잘 본다면 적어도 한 번 봤을 때 아! 하고 단박에 이 사람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니까.
당연히 관상 뿐만이 아닌 다양한 면모를 볼 것인데 뭘 그렇게 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을 나타낸다. 내부 구성원도 아닌 내게 자랑스럽게 밝힐 정도면 평소에 얼마나 자신이 안목이 있다는 걸 자랑했을까?
지위가 높고 권한의 범위가 넓으며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본인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다. 감정 상태, 혈당, 날씨, 촉감, 무게감, 색깔, 욕망 등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변수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인간의 의사판단이 얼마나 감정적인지 보여주는 실험 내용이다.
1.
심리학자 프리츠 스트랙은 실험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한 집단은 볼펜 끝을 치아로 물어서 입이 옆으로 벌어지며 웃는 표정을 만들었고, 다른 집단은 볼펜 끝을 입술로만 물어서 뚱한 표정을 만들었다. 이렇게 두 집단은 똑같은 만화를 보고 재미를 평가했는데 전자는 평균 5.14, 후자는 평균 4.32의 점수를 주었다. 얼굴 표정의 조작만으로 감정이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의 실험이었다.
2.
심리학자 샤이 덴지거는 1,112건의 가석방 신청 통과율을 조사했다. 아침 또는 점심시간 직후에 심리를 받으면 평균 65%가 가석방 승인을 받았지만 점심시간 직전은 거의 0%에 근접했다.
3.
로렌스 윌리엄스와 존 바그는 실험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쪽은 따뜻한 커피를, 다른 한쪽은 차가운 커피를 쥐어주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특정 인물 A에 대한 자료를 읽고 평가를 하게 되었는데 따뜻한 커피를 쥔 집단이 차가운 커피를 쥔 집단보다 A를 더 따뜻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발견되었다.
4.
마르쿠스 마이어는 동일한 남자가 빨간 셔츠를 입었을 때와 녹색 셔츠를 입었을 때 각각 얼마나 똑똑해 보이는지 실험 참가자에게 평가를 시켰다. 이 남자는 빨간 셔츠를 입었을 때 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빨간색 넥타이를 맸을 때도 수입과 리더십 자질을 낮게 평가 받았다.
심지어 면접관의 직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지 보여주는 실험도 많다.
5.
스티븐 가르시아는 실험을 통해 면접관이 자기보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높은 연봉을 받게 되거나, 더 강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게 되는 지원자를 배제하는 사회적 비교 편향을 발견했다.
6.
로빈 도스는 텍사스 의과대학의 추가 합격자들의 성적이 정식 합격자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매년 800명 가량의 지원자 중 면접점수로 150명을 선발했는데 어느 해에 의회의 명령으로 정원으로 200명으로 늘리게 되어 면접점수 700~800등에 해당하는 최하위 학생들 중 50명을 추가로 합격시켰다. 놀랍게도 나중에 비교해보니 학업성취도,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비율이 별 차이가 없었다.
7.
폴 밀은 전문 면접관들에게 대학교 신입생들의 성적, 적성검사 결과, 자기소개서 등의 자료를 제시하고 45분의 인터뷰까지 더하여 그해 말의 성적을 예상하도록 했다. 결과는 통계 공식을 기초로 한 예측보다 못했다.
8.
로렌 리베라는 지원자의 역량이나 경력 등의 자질보다 '문화적 동질성'이 채용 여부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법률 자문, 투자은행, 컨설팅사 등에서 120번의 인터뷰 실험을 한 결과 '운동경기에 관심이 적어서', '18세기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떨어뜨리는 등의 사례가 튀어나왔다. 쉽게 말해 '밤새 술잔을 기울리며 어울릴 직원'을 뽑으려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지원자가 실수라도 하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외모나 옷차림, 출신 대학이 훌륭하면 '후광 효과'가 발생한다. 애초에 한두시간 정도 인터뷰하면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착각인가. 면접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한 지원자의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한다.
리더의 말은 곧 조직문화에 연결된다. 농담이라도 관상을 보고 채용을 결정한다는 말은 그 절차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은 가능성을 높인다. 비전문적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셈이다. 그렇게 채용된 사람을 과연 기존 구성원들이 믿어줄까?
'관상가는 자기 관상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조선에서 제일 관상을 잘 보는 내경조차도 자신의 불행을 피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신이 관상을 잘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새로운 구성원을 들이는 채용에 관한 발언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걸 헤어리지 못한다면 무능한 리더, 나쁜 리더일 수 밖에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