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랜드부스터 켄 Mar 23. 2022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리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 이 글에는 넷플릭스 영화 <D.P>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넷플릭스


넷플릭스 영화 <D.P>에서 조석봉 일병은 자신을 괴롭힌 황장수 병장에게 찾아가 이유를 묻는다.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조석병 일병을 때리고 구박하다 못해 성희롱까지 한 황 병장은 처음에는 비웃음으로 일관하다가 조 일병에게 위협을 당하고 나서야 겁에 질려 내뱉는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Mossad)는 아르헨티나에서 한 노인을 체포하여 예루살렘 법정에 세운다. 이 노인의 본명은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을 감독한 관리자였다.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아르헨티나까지 도망쳤으나 끝내 붙잡혀 전장버죄, 반인도적 범죄 등 15가지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유대인을 보낸 것도 모자라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제작해서 효율적으로 유대인을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아이히만. 어림잡아도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데 기여한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변론했다.


저는 무죄입니다.
저는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출처: 유튜브


아이히만의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요청', '진행', '처리', '수행', '행정', '절차', '명령', '지시'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일관되게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다.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하고 아이히만의 말만 듣는다면 정말 죄가 없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은 명령을 충히 따랐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잡지사의 요청으로 취재를 위해 5번의 재판을 모두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러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책을 하나 쓰게 된다. 악의 본질을 탐구한 한다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악인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악한 존재가 아니고 대단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의외로 악은 평범하고 진부하다 못해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타인의 처지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악이 평범하다는 건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어떤 결과를 낳는지,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과 이득에 충실하면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특히 상부의 지시를 하부에 전달하고 이행하는 중간 리더는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실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황장수 병장, 아이히만 역시 조직의 중간 리더였다.


위에서 시키는데 별 수 있냐? 해야지.

까라면 까야지.

어차피 말해도 안 통해. 그냥 하자.

이거 시키는 대로 한 건데요?

빨리 해야해. 아삽(ASAP, As Soon As Possible)이야.


우리가 흔하게 듣고 흔하게 말하는 말이다. 이처럼 군대, 회사, 학교 등 조직의 수많은 중간 리더들은 마치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열심히 상부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 지시를 수행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신경쓰지 않는 듯 보인다.


아이히만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다. 언론에 나타난 국정농단 사건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청와대 비서관, N번방으로 큰 돈을 번 범죄자들, 세월호의 선장과 간부들이, 옥시 가습기 살균제의 담당자들,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들이 돋보일 뿐이지, 우리 주변에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며 평범하게 악행을 벌이는 중간 리더는 차고 넘친다.


대표와 팀원 사이 샌드위치 신세인 팀장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니까, 이 회사는 군대처럼 상명하복의 문화라서,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이게 최선이니까. 명분은 차고 넘친다. 안타깝게도 이런 변명은 아이히만이 예수살렘의 법정에서 한 말과 동일하다. 만약 아이히만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충실한 공무원이었을 것이다. 


관료제를 모방하여 상하 등급의 리더를 두는 조직 체계는 책임의 크기를 별하고 리스크를 최대한 분산시켜 업무의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인간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단점도 있다. 대부분의 책임을 최고 리더가 지기 때문에 체계 속에 숨어 그저 소모당하는 부품처럼 생각 없이 최고 리더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중간 리더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시간을 갉아먹고, 인생을 허비하며, 감정을 소모시키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리더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리더는 무능한 리더이자, 나쁜 리더다.


끝.

이전 09화 관상을 보는 리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