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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Mar 17. 2023

학벌의 이득과 학폭의 손해는
유효기간이 같아야 한다.

1.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 2가 공개됐다. 드라마가 화제가 되니 자연스럽게 학폭에 대한 의견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의견이 눈에 띄었다.


학폭 가해자를 평생 낙인찍고 처벌하는 건 반대다.
어린 시절의 실수나 잘못으로 평생을 구속하지 말자.


아쉽게도 이런 취지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다. 명문대를 나온 기업의 대표나 유명한 작가까지 이런 의견을 내비친다. 물론 전체적으로 학폭 가해자를 완전히 용서하자는 취지가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을 해소하고 학폭의 근본적인 해결책과 종합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충격을 받은 건 어쩔 수 없다.


며칠 동안 잠 한 숨 못자다가 이제야 글을 쓴다.



2.

학폭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문장 한 줄이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학폭의 권위자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학폭을 경험한 피해자 입장에서 학폭이 어떤 개념인지 명확히 밝혀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학폭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이해를 한다면 적어도 얼굴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하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이 글은 혹여 학폭 가해자를 조금이라도 옹호할 마음을 가진 잠재적인 2차 가해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고자 쓴 학폭 피해자의 호소다.



3.

첫째, 학폭과 친구 사이의 싸움을 구별했으면 좋겠다. 학교폭력은 단어 그대로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이다. 그러나 시대적 맥락으로 봤을 때 지금의 학폭은 친구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양방 폭력이 아니다. 학폭은 만화에서 미화하는 학생들끼리 힘을 겨루는 싸움이 아니다. 학폭은 힘이 강한 학생이 힘이 약한 학생에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고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히는 일방 폭력이다. 학폭은 쌍방과실이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싸우는 아이들을 지나가다가 구경했다는 이야기와 자신이 정치질당해서 싸울 뻔했다는 경험담은 학폭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과거 학교는 서열을 위해 치고받는, 교사도 학생을 때리는, 자신도 왕따의 위험에 늘 노출된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라는 경험담은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설명할 때는 적절하지만 작금의 학폭을 다루기에는 전혀 상관 없는 예시다.


둘째, 학폭 가해자의 범위를 축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애들이고 높은 확률로 가정 환경이나 정신에 우환이 있는 미성숙한 애들이나 학폭을 저지른다고 하는 근거는 정말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단 그 '높은 확률'의 로우 데이터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은 확률로 미화시킬 수 없다. 가정환경이나 정신에 우환이 있는 미성숙한 애들이 학폭을 저지르는 건 동정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죄가 가벼워지는 이유는 아니다.


높은 확률이 아니면 다 무시해도 되는 건가? 정작 그 확률을 인정하더라도 낮은 확률이 폭력 또한 현실이다. 낮은 확률이라도 부자에 권력자인 부모를 가진 아이,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보호해주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저지르는 학폭이 더 잔인하다. 부모와 선생님의 보호를 받는 아이는 학교에서 천하무적이니까.


<더 글로리>에서 나온 학폭이 현실에서 가능하겠냐며, 그런 사람이 실제로 몇 명이나 있냐면서 기성세대 가진 학교에 대한 트라우마 탓 아니겠냐고 눙치는 표현 또한 안타깝다. 검색만 해도 <더 글로리>의 학폭이 실화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학폭의 범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하고 잔인하다. 애들이 이런 행동을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큐 두 자리 이상의 인간인 이상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인지 잘못되지 않은 것인지 구별할 수 있다.


셋쩨, 학폭이 왜 끊임없이 발생하는지 한번쯤은 고민했으면 좋겠다. 학폭은 실수나 잘못이 아닌 법적으로 처벌받고 사회적으로도 손해를 끼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폭은 잘 드러나지 않고 이전부터 지금까지 쉼없이 발생한다.


왜 사람은 사람을 괴롭힐까?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확인하고 자신의 지위를 상대방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위를 원한다. 두 명만 모여도 누가 위인지를 분석한다. 학교는 학업 성취도와 상관없이 일단 동갑인 아이들을 한 반에 몰아넣는다. 이렇게 한 학년, 한 반에 모인 아이들은 서로 동등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지위가 생긴다. 외모, 성적, 운동능력, 그리고 폭력에 의한 위계가 발생한다. 학폭은 지위를 만들어내는 가장 원초적이면서 극단의 수법이다. 학폭을 당한 피해자는 앞으로는 반말하는 동등한 사이인데 뒤로는 폭력에 의한 상하위계를 인정해야 하는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왜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피해자는 쉽게 벗어날 수 없을까? 책임이 없는 미성년자는 권한도 없기에 학교를 혼자 힘으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는 투표를 할 수 없고, 법률 행위에 법정대리인이 필요하다. 이런 미성년자가 모인 곳이 학교다. 학교는 법이 아닌 아이들이 만든 나름대로의 위계와 질서가 지배한다. 그릇된 폭력이 터져도 그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체계가 입을 틀어막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부모가 밥벌이 할 동안 아이를 맡아주는 탁아소이자 아이를 미래의 일꾼으로 길러내는 공간이다. 학교는 사회와 어른을 위한 공간이다.


또한 학폭을 인정한다는 건 자존심 문제도 크다. 병원에 가기 싫은 이유는 자신이 병에 걸릴 정도로 나약하다는 약점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마찬가지로 학폭을 이야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학폭을 당할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말하기 싫어하는 내면의 자존감 때문이다.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한 친구들 사이에서 본인의 지위가 낮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학폭을 당한 피해자는 육체가 아닌 정신부터 무너진다. 그래도 꾹 참고 다니면서 견딘다. 자신과 부모를 위해서 말이다.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학교는 꼭 다녀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도 한 몫한다. 피해자에게 학교는 빠져나갈 수 없는 시간제 감옥이나 다름없다.


넷째, 학폭의 피해가 평생 간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가해자는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끝나는 일일지 몰라도, 피해자는 평생 그 환경에 놓인 자신을 잊지 못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평생'이다. 다녔던 학교라는 이유로 그 치욕스러운 기억을 계속 떠올리는 건 고문보다 힘들다. 가해자가 평생 손해 보는 걸 반대한다면 피해자의 평생 트라우마를 외면하자는 의미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음이다.


학폭을 당해보지 않았으니 학폭에 대한 생각을 말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학폭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학폭 가해자가 평생 손해를 보는 게 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4.

나는 명문대를 가지 못했다. 환경이나 재능을 탓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나는 노력하지 않았다. 명문대를 가겠다는 목표 잡지 못했다. 명문대를 가기 위해 재수도 하지 않았다. 명문대를 동경했으나 그에 맞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서일까. 나는 명문대 출신을 존중한다. 그 혈기왕성한 십 대의 시간 전체를 투자하여 목표를 잡고 남들보다 노력하여 값진 성취를 이루어낸 노력을 인정한다. 실제로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기회를 많이 얻고 주목을 자주 받는 현상을 전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투자의 이득을 얻는 거니까.


명문대 학벌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필요악이다. 괜히 이력서에 학력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학교가 같은 사람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 이왕이면 좋은 학교 출신에게 더 믿음이 가는 건 인간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를 쓰고 명문대를 가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왜 갑자기 학벌을 이야기할까? 사실 학벌과 학폭은 동일한 십대의 시간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신이 만약 학폭 가해자가 평생 손해 볼 필요 없다는 생각을 잠깐이라도 했다면 혹시 이런 생각도 해보지 않았나 묻고 싶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인 십 대를 좋은 학교에 가는 데 투자한 사람이 평생 학벌의 이득을 누리는 게 허용된다면 같은 시간을 누군가를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데 소비한 사람이 평생 학폭의 손해를 감당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학벌의 이득과 학폭의 손해는 유효기간이 같아야 한다. 왜 같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며 얻은 이득과 손해를 분리하나? 왜 학벌의 이득은 평생 챙기면서 학폭의 손해는 평생 받으면 안 되나? 좋은 학벌로 평생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반대로 나쁜 학폭 가해자는 평생 손해를 보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다.


술을 먹고 저지른 범죄가 감경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십 대라는 이유로 죄를 저지른 게 감경되어서는 안 된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에서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가해자는 들키지 않고 잘 살고 있는데 피해자는 평생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면 말이다.


가해자의 손해는 더 큰 손해를 본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법적 처벌을 제외한다면 오직 피해자의 용서만이 가해자의 사회적 손해를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용서는 의무가 아니다. 사과를 하고 정말 반성하는 모습이 보여도 피해자가 용서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해자의 손해를 제삼자가 논할 여지는 한 톨도 없다. 정말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명문대를 갈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이 깃든 쌩쌩한 지능과 체력을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 쓴 학폭 가해자를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내용은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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