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랄프로렌
평창 올림픽에서도 미국 선수들의 가슴 팍에는 폴로 마크가 새겨진다. 베이징, 리우를 포함하여 벌써 6번째 올림픽. 랄프로렌이다. 지난 50여년간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세일즈 해온 남자. 한 때 미국 전역이 랄프로렌 화(化) 되었다는 의미에서 로레니피케이션 오브 어메리카(Laurenification of America)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남자. 2017년, 슬로베니아 출신의 미스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랄프로렌 드레스를 입은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녀 또한 아메리칸 드림의 산 증인이니까.
아메리칸 드림을 창조한 남자
미국 유학시절 경험한 뉴욕 매디슨가의 랄프로렌 플래그쉽 스토어는 현실 너머의 공간이었다. 꿈의 세계, 미국인들이 열망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였다. 고풍스러운 맨션 안으로 들어서면 게츠비의 저택에 초대받은 데이지가 된다. 마호가니 원목, 유서 깊은 초상화, 이국적인 카펫. 골동품,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옷들. 와스프(White-Anglo-Saxon-Protestant)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사회의 실사판이었다. 랄프로렌은 자신이 파는 것이 옷이 아니라, 꿈이라고 했다. 최강대국 미국을 등에 업은 풍요로운 꿈. 정작 이 꿈을 창조한 남자가 가난한 유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라는 점은 아이러니이지만. 사내는 꿈을 팔아 꿈을 이루었다. 현재 랄프로렌의 재산은 6조원에 이른다.
박제된 클래식의 추락
영원할 것 같았던 랄프로렌 왕국이 흔들리고 있다. 영업 이익은 2015년 이후 매년 10% 이상 하락하는 중이다. 같은 기간 주가는 폭락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멋있지만, 이제 지겹다. 랄프로렌의 무기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클래식'이다. 그런데 ‘박제된 클래식’에 머물렀다. 랄프로렌을 보고 신선함을 느꼈던 기억은 아득하다. 주변 상황도 랄프로렌에게 유리하지 않다. 현재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작고 날렵한 스트리트 브랜드다. 랄프로렌은 너무 무겁다. 자라,유니클로 같은 패스트 패션은 가격과 스피드로 목을 조여온다. 사람들은 백화점 대신 온라인으로 옷을 산다. 하나같이 랄프로렌에게는 악몽처럼 들리는 뉴스들이다. 제 아무리 유행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랄프로렌의 강점이라지만 과거에만 갇혀 있으니 변화의 물결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이제 랄프로렌은 미국의 국민 브랜드에서 꼰대 아저씨 브랜드로 전락해버린 ‘브룩스 브라더스’와 비견된다.
2016년, 창업자이자 CEO였던 랄프로렌이 자신이 세운 왕국에서 내려왔다. 통치기간은 48년이었다. 황제는 미련을 놓지 못한다.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영입한 스테판 라르손은 황제와 갈등을 빚다가 2년도 못되어 사직했다. 매디슨가의 저 유명한 플래그십 스토어는 누적된 적자에 2017년 정리되었다.
전통인가 골동품인가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는 한 인터뷰에서 “옛 것만 굳어졌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다” 라고 했다. 클래식도 늘 새로워야 한다. 107년 역사의 구찌는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 1990년대에는 톰포드가 주인공이었다. 관능적이면서도 도회적인 ‘포르노시크(porno-chic)’로 죽어가던 구찌를 벌떡 일으켰다. 현재는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이끈다. 히피와 복고감성이 수놓인 휘황찬란한 의상으로 107세의 할머니 브랜드를 지구상에서 가장 핫하게 만들었다.
랄프로렌의 수술 소식이 들려온다. 직원들을 감축하고, 매장들을 정리하며, 비용을 낮추기 위해 몸부림친단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변화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클래식을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고객을 놀래킬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이상 랄프로렌의 부활은 아득할 뿐이다. 랄프로렌이 새 옷을 입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