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김생민
아내가 변했다. 드라마가 아닌 ‘김생민의 영수증’을 본다. 급격한 방향전환이었다. 우리 집에서 아내는 소비의 아이콘이었다. 소비에 관한 한 아내는 엑셀, 남편은 브레이크를 밟는 역할이었다. 김생민을 보면서 아내는 연신 웃어댔다. 공감의 웃음이었다. 반성의 쓴웃음이었다. 아내는 마트에 갈 때 마다 김생민이 생각난다 했다. 내가 이렇게 돈을 써도 되나. 이건 빼야겠다. 남편의 브레이크는 녹이 슨다. 김생민에게 큰 절이라도 올려야 할 판이다.
만나면 좋은 친구
김생민은 익숙한 얼굴이다. 25년 동안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연예가중계, 동물농장, 출발 비디오여행... 만나면 좋은 친구였다. 그런데 보고 싶어서 기다린 적은 없는 친구였다. 몇 년간 같은 양복을 입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는 친구. 개그맨이라고는 하는데 별로 웃겨본 적은 없는 친구. 그는 신동엽이 될 수 없었다. 이휘재처럼 수려한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리포터가 되었다. 연예계에서 3D라 불리는 직군이었다. 스타가 된 동료들을 인터뷰하러 다녔다. 정말 멋지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김생민은 발군이었다. 서서히 진가가 드러났다. 성실하고 겸손했다.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해냈다. ‘신뢰’ 라는 단어가 그를 따라다녔다. 부침 심한 연예계에서 25년을 살아남았다. 그보다 앞서 날아오른 수많은 별들이 사라진 후였다.
김생민의 짠물수비
연예인은 프리랜서다. 찾는 사람이 없으면 '프리한 지옥'이 펼쳐진다. 대중이 찾아줘야 하고, 피디가 찾아줘야 산다. 대다수의 연예인은 따박따박 월급 받는 직장인들을 부러워한다. '개편' 때마다 맘을 졸인다.
김생민은 미래가 두려웠다. 그는 확실한 한방이 없는 개그맨이었다. 수비에 올인했다. 한번 들어온 돈은 내보내지 않았다. 이탈리아 축구팀의 밀집수비를 능가하는 '짠물수비'였다. 매니저 없이 직접 차를 몰았다. 방송국 구내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KBS 방송국 내 은행이 그의 놀이터였다. '자존심''기분' '체면'이 공기처럼 부유하는 연예계에서 그는 취하지 않았다. 블랙스완이 되었다. 외꾸들의 세계에서 홀로 두 눈을 뜬 사람이었다. 돈이 모였다. 동료들은 ‘유별난' 그를 기억했다. 송은이, 김숙이 자신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초대했다. 김생민은 모두에게 친숙한 얼굴이었다. 만만한 오빠였다. 오빠가 청취자의 영수증을 분석해줬다. 너 그렇게 돈 쓰면 망한다고 타일렀다. 스튜핏! 밉지 않았다. 한번도 떠본 적 없는 오빠였다. 그런데 절약해서 타워팰리스를 산 오빠였다. 오빠의 조언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똑똑한 경제 전문가가 말했을 때는 들리지 않던 말이었다. 공중파 파일럿 프로그램이 편성되더니, 결국 정규 방송이 되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한국형 모세
부자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지출보다 수입이 많으면 된다.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 나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으면 된다. 끝. 이론은 쉽다. 실천이 어렵다. 인간의 결심부터가 그리 믿을게 못 된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것이고, 딱 이번 세일 기간에만 돈을 쓰는 것이다. 경기가 얼어붙었으니 '양적 완화'라는 이름으로 돈을 찍어낸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경제를 심리라 한다. 심리를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 심리가 안정되지 않으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 빚은 불어난다. 살이 찐다. 나라는 파산한다.
대한민국은 빚 공화국이다. 가구당 평균 부채는 7,000여만원에 이른다. 지출이 수입보다 커서 발생하는 ‘나쁜 빚’이 쌓여간다. 이 와중에 왜 금리까지 오르고 난리야. 부채의 시한폭탄은 소리가 커진다.
김생민의 한숨은 깊어진다. 스튜핏, 스튜핏, 베리 스튜핏! 어떻게 빚을 지고도 그리 태연하게 돈을 쓸 수 있는가. ‘욜로’ 같은 철없는 소리는 하덜 말거라. 성경에는 빚진 자를 두고 '채주의 노예’ 라고 했다. 내가 빚쟁이 노예들을 해방시키리. 25년간 광야에서 내공을 쌓은 모세의 탄생이다. 한국형 모세는 십계명을 전파한다. ‘소화가 안 될 때는 소화제 대신 점프를!’ ‘옷은 기본이 22년이다.’ ‘수분 공급은 진짜 물로’. 소비를 통제하지 못했던 이들이 신용카드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부러뜨렸다. 소비가 줄어들었다. 홍해가 갈라졌다.
브랜드는 시간이 완성한다
김생민은 대체제가 없는 브랜드이다. ‘가격’을 소구해야 하는 광고에서 김생민 외에 생각나는 모델은 없다.
경영 저널리스트 데릭 톰슨은 저서 ‘히트 메이커스’에서 히트하는 컨텐츠는 마야 법칙(MAYA : Most Advanced, Yet Acceptable)을 따른다고 썼다.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수용이 가능한 컨텐츠라야 히트할 수 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 다름과 공감의 조화. 김생민도 마야 법칙에 들어맞는다. 오랜기간 보아온 얼굴이었다.(익숙함) 어느날 보니 재테크의 달인이었다.(다름)
좋은 브랜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브랜드를 다듬어주어야 한다. 나이키도, 파타고니아도, 유재석도 이 시간을 견뎠다. 단박에 뜨는 브랜드는 불안하다. 반드시 흔들림을 겪는다. 김생민의 좌우명은 ‘하루하루 착실히 살다 보면 결국 결실을 맺는다' 이다. 착실하게 TV에 얼굴을 비쳤다. 익숙함이 쌓여갔다. 새로움을 시도해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재발견되었다. '익숙함'의 토양이 없었다면 히트 브랜드 김생민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김생민 스스로 마야 법칙을 모색 했을 리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랜세월 꾸준히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김생민식 준비기간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되었고, 적절한 때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결국, 김생민 브랜드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