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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보이 Feb 01. 2018

[무인양품]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

브랜드 무인양품

'브랜드가 없음'. 이보다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도쿄의 부촌 아오야마에 위치한 '파운드 무지' 매장. 명품족들 사이에서 '의식있는 시골청년'의 아우라를 발산한다.
[파운드 무지] 동아시아에서 발굴해낸 '무인양품스러운' 물건들
[파운드 무지] 상품을 출신 국가별로 분류했다.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국
[파운드 무지] 작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 한국 섹션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서울신문'은 깨알 아이템
[파운드 무지 book] 파운드 무지의 아이템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4년전 쯤 매장에서 구입했다. 4,000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상당히 고가였다


아버지는 오랜기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사셨다. 출판업으로 인생 노선을 변경하신 후에도 늘 당신의 아이덴티티는 광고인이셨다. 그만큼 광고일을 즐기셨다. (본인 표현으로는 ‘미치셨다’) 아버지의 직업병(?)은 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카피를 쓰시면 나와 동생을 불러 의견을 물으셨다. (서로 바이어스가 끼지 않도록 따로 부르셨다) 이 안이 좋니. 저 안이 좋니. 이게 왜 더 좋니. 다시 한번 봐볼래? 유태인들은 부모와 자식이 밥상머리에서 ‘경제’와 ‘정치’를 논한다는데 우리집의 주제는 ‘광고’와 ‘브랜드’였다. '최초' '전략' '차별화' '잭트라우트' '오길비' 같은 단어들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결국 대를 이어 광고밥을 먹고 산다.

   
로고를 멀리하는 카피라이터
아버지에게는 독특한 습성이 하나 있으셨다.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는 옷은 입지 않으셨다. 로고가 없거나 아주 작아야지만 맘에 들어 하셨다. 브랜드를 파는 카피라이터가 브랜드 옷을 멀리하는 아이러니.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 하셨다. 브랜드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본인이 광고판의 역할을 하는게 싫다 하셨다.
아버지가 ‘무인양품' 을 좋아하신 건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브랜드 없는 브랜드’. 브랜드라는 거품을 걷어낸 이 컨셉을 아버지는 놀라워하셨다. 대단한 철학이라고 생각하셨다. 무인양품은 밥상머리에 늘상 오르는 브랜드가 되었다.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갈 때면 긴자와 신주쿠에 있는 무인양품 매장에서 상당시간을 머물렀다. 현장학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양손에 쇼핑백을 한 가득 들고 나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무인(無印: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양품(良品:좋은 품질의 제품). 시대의 조류에 반하는 컨셉이었다. 그때까지 브랜드는 소비의 근거였다. 프리미엄이었다. 무인양품은 외쳤다. 껍데기는 가라. 본질로 승부를 보겠다. 소비자에게 고하는 양심 선언이었다. 무인양품식 사명이었다. ‘이것이 좋다’, ‘이것을 꼭 사야한다’ 가 아닌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제안했다. 디자인에는 ‘개성’을 담지 않았다. 필연성 없는 파격은 지양했다. 디자이너 채용 공고에는 ‘디자인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소비자들은 무인양품의 의도를 알아봤다. 무지 매니어들이 양산됐다. 이제는 30여개 나라에서 300억엔(약 3조원)에 달하는 연 매출을 올린다. 브랜드를 없앴더니 가장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다. 역설이었다.
   
사명다움이 된다
‘파운드 무지’는 무인양품이 또 한번 시대의 필요를 읽은 프로젝트였다. 점점 더 특색 없는 공산품들만 판을 쳤다. 고유성을 간직한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지? 우리가 찾아보자. 새로운 사명이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될성부른 물건을 발견했다.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간소하면서도 쓰임새가 확실한 ‘무인양품스러운’ 아이템들. 전라도 담양에서는 죽세공품을 발굴했다. 미국 아리조나 주에서는 밀가루를 담는 포대, 일본의 아오야마현에서는 사과 상자를 발견했다. 쓰임이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아이템이었다. 이를 현대적으로 개량해 출시했다. 파운드 무지를 이끄는 후카사와 나오토는 “아무도 상품화하지 않을만한 것을 발견해 제품으로 만드는 게 파운드 무지의 저력”이라고 했다. 찾는 사람이 없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물건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 무인양품다운 제품을 찾다 보니 '무인양품다움'이 한층 또렷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맞아 이런 게 무인양품다움이었어. 정체성이 분명해졌다. 선순환이었다. 세상의 필요를 해결하려 하니 복을 받았다.

아오야마의 파운드 무지
파운드 무지의 단독 매장은 도쿄 최고의 부촌 아오야마에 있다. 꼼데가르송, 샤넬, 에르메스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집결한 곳이다.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세련된 명품족들 사이에 껴있는 의식 있는 시골 청년의 모습이었다.
30년 전 무인양품 1호점이 이 자리에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오야마의 호화로움과 무인양품의 간소함이 충돌했다. 충돌은 화제를 낳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아오야마에서는 마르지엘라도 사지만 무인양품을 구매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아니, 상당히 뿌듯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2003년, 무인양품의 1호점은 파운드 무지의 단독매장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아오야마 한복판에 있는 파운드 무지 매장은 그 자체가 메시지였다. 여기 전세계에서 발굴해온 오리지널들을 보라고. 진짜배기 명품이란 이런 게 아니겠냐고. 파운드 무지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고객들은 기대감을 안고 찾아왔다. 오늘은 또 어느 나라에서 가져온 신선한 아이템을 보여줄까. 파운드 무지의 메시지는 통했다.

무인양품은 브랜드가 되었다
무인양품의 카나이 마사아키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김치를 만들 줄 모른다는 사실을 두고 탄식했다. 어떻게 당신네들은 김치 같은 멋진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눈뜨고 보기만 할 수 있는가. 왜 메이크업, 해외 패션 같은 가벼운 문화에만 빠져 있는가. 그는 무인양품에서 김치 교실을 만들어 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을 일본의 기업가가 해주고 있었다. 역시 무인양품이구나 하는 감탄이 나왔다. 이들은 언제나 이 시대의 필요를 바라봤으니까. 필요는 사명이 되었으니까. 브랜드를 없애고, 파운드 무지라는 희대의 프로젝트를 발족시킨 사람들이니까. 사라질 뻔한 여러 ‘김치’들을 구해낸 장본인들이니까.
카나이 회장은 경쟁사들과 무인양품의 차이점을 ‘사상의 유무’라고 단정했다. 더 나아가 무인양품에게는 사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무인양품에게는 애초에 브랜드가 필요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사상이 이미 브랜드였다. 브랜드는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었다. 사명을 쫓고 고객들의 필요를 채워주면 브랜드가 되는 것이었다. 브랜드는 감동받은 느낌이었다. 고마움이었다. 기대감이었다. 존경심이었다. 무인양품은 스스로 브랜드가 되려 하지 않았다. 브랜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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