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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지휘하지 않는다.

지휘 없는 합창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진 :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 출처 : arte 365



01 이야기 하나 : '지휘'없는 합창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 친구 크리스틴은 지금의 멋진 남편을 만나기 전 한동안은 발렌타인데이에 데이트할 사람도 없는 가련한 처지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열광하는 축구팀 아스널 FC와 언제든 함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1988년 2월의 어느 습한 저녁, 그녀는 아스널 FC와 프랑스의 축구영웅 미셸 플라티니가 감독을 맡은 프랑스 유스팀과의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 아스널 홈구장인 하이버리 구장에 갔다.


그런데 경기 시작 후 30분도 안 돼서 런던 한복판의 구장에서 프랑스어로 부르는 응원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많은 축구 응원가들이 그렇듯이, 농담조로 심판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Qui est le ba(s)tard dans le noir(저 검은 옷을 입은 새끼는 누구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걸 표준 불문법 문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딱히 선율도 없이 계속 반복해서 부르니 특별히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가 빨라지면서 이윽고 모두가 함께 부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틴처럼 축구에 목매는 팬들은 그 짜릿한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악보도 없고, 리허설도 없고, 지휘자도 없고, 반주도 없다. 누구 하나 억지로 '시키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서로 배우고 모방함으로써 합창에 참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excerpt from, 마크얼스, <허드>, 쌤앤파커스, 2009, pp.72-73




[깨알 소개] 마크 얼스의 허드. 통찰력으로 가득 찬 책이다. 하지만, So what?을 찾아야 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8년 전에 읽은 책인데, 아직도 추천할 만한 책.



촛불시위가 퍼져나갈 때 MB 정부는 뒤에서 조정하는 '배후세력'이 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만일, 어떠한 현상과 사태를 이끄는 배후세력이 없다면? 현상 자체가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계 현상이라면? 전형적인 관료적 사고방식을 가진 공무원, 정치인들이 아무 생각없이 쉽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마케터들과 브랜더들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이른바 컨트롤 타워.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형식 안에서 만들어지고, 새로운 형식은 소수의 컨트롤 속에 갇혀질 때 그 존재이유가 되었던 '새로움'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이 경우, 존재는 곧 부재가 된다.




02 이야기 둘 : 철새떼와 보이드


아래 사진은 2011년 10월 즈음 임진각에서 우연히 세 컷을 찍게 된 철새떼 이동 사진이다. 당시 고물 핸드폰을 쓰고 있어서 화질이 좋지 않다. 동그라미도 마우스로 대충 그렸던 것인데, 마우스 펜으로 그리지 않은 원본을 삭제해서 그것마저 이쁘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 저 빨갛게 표시된 새를 주목하라.



A. 새가 이탈하기 시작한다.


B. 새의 완벽한 방향감각 상실. 완전 이탈.


C. 하지만, 새는 이내 곧 자리를 되찾는다.


과거 <동물의 왕국> 스타일이었다면, 저 맨 앞에 있는 철새 우두머리의 강력한 명령에 따라 철새떼는 일사분란하게 V자 편대로 대형을 유지하며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은 동물 무리에서 '대장'으로 간주되는 동물의 명령이나 지시로 군집의 행위가 결정된다는 식의 해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인식은 군집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KBS 1TV,  <동물의 왕국>. 1969년 10월 12일부터 마치 시즌제처럼 중간 중간 쉬어가며 지금까지 유지된 프로그램. 영국 BBC 등에서 제작한 동물 다큐를 소개.


위에서 내가 찍은 임진각 철새떼 사진을 보면, 그 새 한 마리는 자기가 대형을 이탈하자, 정위치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 사이 '대장 철새'한테 명령을 받은 것일까.


군집의 분산된 행동 모델에 관해 우리는 크레이그 레널즈(Craig W. Reynolds)의 모델링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 <Flocks, Herds, and Schools: A Distributed Behavioral Model>, Published in Computer Graphics, 21(4), July 1987, pp. 25-34.


논문에서 발췌. 뭔가 있어 보이는 이미지라 삽입했음. 궁금한 사람 논문 읽어볼 것.


크레이그 레널즈는 MIT에서 컴퓨터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설계하던 중, 야생 동물이 군집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일사분란한 행동을 시뮬레이션하고자 했다. 이른바 '조율된 행동(Coordinated Activiy)'이다. 그는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단위 노드(인공 새)를 '보이드(Boid)'라고 명명했는데, 그 보이드에는 몇 가지 매우 단순한 행동 규칙을 입력해둔다. 이 행동 규칙은 양떼, 새떼, 소떼 등 동물들의 행동에서 관찰되는 몇 가지 특성들을 반영한 것이다.



A. 충돌 회피 : 근처에 있는 새들과 충돌 회피

충돌 회피 : 근처의 무리와의 충돌을 피하십시오.


B. 속도 조절 : 근처에 있는 새들과 속도를 맞추려 노력

속도 매칭 (Velocity Matching) : 주변의 무리와 속도를 맞추려는 시도


C. 중심 조정 : 근처에 있는 새들과 가까이 유지하려 노력

무리 중심 : 가까운 무리에 가까이 머물러보십시오.



이 세 가지 행동 규칙이 입력된 다수의 보이드들을 놓아두자, 유사하리만큼 철새 이동의 양상과 비슷한 군집 이동을 보이게 됐다(이건 나도 영상으로 확인함).


결국 저 철새 떼들이 완벽하리만큼 V자 대형을 유지하면서, 자신보다 큰 독수리나 더 사나운 조류가 나타났을 때에도 집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태세를 보일 수 있는 건, 대장 새의 지시에 따른 일사분란한 액션 때문이 아니라는 거다. 저 복잡하고 어려운 행위를 만드는 일사분란함에는 어쩌면 매우 단순한 저 세 가지 원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도모하고자 하는 모든 무브먼트에는 저러한 단순한 원칙이 필요하다.




이야기 셋 :<인디브랜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나는 한 술 더 떠서, 어쩌면, 저러한 원칙 따위도 불필요할 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초기 시작에 있어서는 말이다. 그리고 원칙을 입안할 누군가 운영진 등 컨트롤 타워 따위도 불필요할 것이다.


인디브랜드는 그런 매거진이다. 지향 가치도 없고, 포지션도 없다. 필진들의 자격 조건도 없다. 댓글과 선호도, 공유, 반박 등 담론을 구성하거나 그 언저리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행동 규칙을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어떠한 특정 값을 가지고 있는 보이드들이다. 여전히 '일차원적 인간'으로서, 우리를 지배하는 공통의 사유 형식은 있을 것인데(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의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인식의 도끼가 쉽사리 나오긴 힘들 것이다), 그 공통의 사유 형식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심지어 그 '서로'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일 때에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깊이 해석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글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매거진이 될 것이다.


이상의 원칙은 시작부터 내세워지는 일정한 원칙이나 컨트롤을 막고자 하는 차원에서, '최소한의 컨트롤'로서만 기능한다.


글쓰기가 부담스러운가? 그렇지 않아도 된다. 단 한 줄 짜리 글도 무방하다. 다만, 맥락없이 소통될 수 없는 선문답처럼 의미를 지나치게 열어두는, 다시 말해 그러한 '의미의 방종'으로 오히려 의미를 고갈시켜버리는 그러한 글은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고 애써 그런 글을 금지하려 하지 말자. 그런 글은 공동체에서 저절로 상호 작용 속에서 더욱 소통할 수 있는 글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인디브랜드.


이제 시작.


그 시작은 누가 되든 상관 없다.




2018.5.23.

새벽 1시 32분


인디브랜드 제안자, 최장순(崔章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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