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평생의 업, 마케터
<블라인드>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로, 이메일 인증을 완료하면 재직 중인 회사 라운지, 업계 라운지, 직무 라운지 등을 둘러보고 소통할 수 있다. 회사 이름 외엔 익명이라는 점을 빌어 아주 진솔한 이야기가 종종 올라오곤 하는데, 마케터 라운지에 자주 나오는 얘기가 있다.
"모든 회사 마케터의 삶은 거지 같은 걸까요?"
"그 품목의 사장이 된다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해야 하는 게 PM(product manager)의 장점이자 단점이네요"
"어떤 식으로든 제품 관련된 유관부서의 모든 이슈를 알아야 하고 일 많고 책임도 많고 담당이 애매한 일은 모두 맡아야 하고.. 주인의식은 마케터만 있어야 하는 건지 너무 스트레스받아요"
매우 매우 맞는 말이라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터, 프로덕트 매니저는 정말 상상 이상의 업무범위를 다룬다. 일단 담당 제품이 신제품이라면 계약단계부터 시작한다. 제조사와의 단가 협의, 경쟁사 및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한 제품 수량 및 스펙 조정, 최소 주문 단위, 제품 패키지의 종이 재질과 중량 및 인쇄도수, 패키지 디자인, 고리를 만들지나 다리를 만들지 결정하는 패키지 칼선, 허가사항 및 법적 문제 확인, 중박스에 소박스 몇 개 들어가게 할지, 바로 매장에서 박스 뜯어서 디스플레이 가능하게 칼선을 넣을지 결정하고 제조 일정까지 조정하는 것만 해도 그저 새발의 피, 론칭 전의 단계일 뿐이다.
론칭 직전엔 신제품 소개자료를 만들고-소개자료도 글로벌 보고용, 내부 보고용, 대외용, 영업사원용 다 다르다- 예상 매출 5개년치와 기존 제품과의 충돌은 없을지를 고려하여 전체 P&L 숫자도 만든다. 영업부 타겟까지 정리하고 나면, 거래처 몇 곳에 입점할지나 주문 1회당 목표 금액은 얼마인지를 고려하여 예상 그림을 그리고 이에 맞는 적정 프로모션 구간도 정해서 기안을 올린다. 제품 브로셔와 매대, POP도 만들어야 한다. 물론 브로셔 문구를 제품 포지셔닝 및 장점에 맞게 만들고 디자인하는 것도, 매대가 어느 정도 사이즈로 어떤 재질로 어떤 색상과 디자인 및 문구로 제작할지, 단가를 협의하여 정하는 것도 프로덕트 매니저의 몫이다.
론칭 후엔 본격 시작이다. 매일 입점 채널을 업데이트받고, 매출을 트래킹 한다. 단톡 방에 모닝 키 메시지를 공유하고 영업부 베스트 케이스를 공유하여 판매를 독려한다. 월 목표를 정해주고 선착순 달성자 3명에 대하여 상품 지급도 한다.
드디어 메인, 마케팅 캠페인을 구성한다. TV CF를 하기로 했다면, 예산안을 따오고 감독 선정하고 어떤 분위기로 할지 샘플 영상을 보낸다. 배우 선정을 하고, 스토리보드를 검토하고 메시지 및 오디오 소리도 정한다. 촬영 날은 밤 12시 전에 집에 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상이 나오면 오디오 조정하고 (예전에 "액션"이라는 발음이 마음에 안 들어서 6번 수정한 적도 있다) 그래픽 및 CG를 다시 입힌다. 그리고 심사와 수정을 5번에서 10번 정도 반복하면 이제 최종본이 나온다. 광고심의 진행하고, 베스트 컷을 바탕으로 이미지나 제작물도 만들고 홈페이지에도 도배한다. 영상이 나왔으면 TVCF만 할 수 없다. 유튜브 상품 및 타겟팅 그룹을 바잉하고 3일 또는 일주일마다 조합을 바꿔가며 가장 효율 높은 방안을 찾아간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광고도 빼놓을 수 없다. 유튜브는 6초에서 1분까지의 흥미 및 홍보 목적의 영상이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광고는 좀 더 프로모션적인 내용의 이미지로 구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타겟팅 그룹을 정하고, 각 특징에 맞게 이미지와 메시지를 다르게 구성하여 3일마다 조합을 바꾸어가며 효율성을 본다. 네이버도 놓칠 수 없다. 검색광고, 카페 및 블로그 리뷰 이벤트도 타겟에 맞춰 해야한다. 이렇게 캠페인이 끝나면 매출과 마케팅 효과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관련하여 협업하는 유관부서 수도 어마무시하다. 제약회사였으니 더 했을 수도 있지만, 내부로는 메디컬 부서, 허가부서, 법무부서, 채널별 영업 담당자, 지점장, 회계 재무부서, 유통 및 재고관리부서, 구매부서가 있다. 외부로는 제조사, 채널별 벤더 및 바이어, 인쇄업체, 창고 및 배송 업체, 협력사 담당자, 마케팅 에이전시, 디자인 에이전시, PR 에이전시 등이 있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손가락으로 두 번은 튕겨 내려야 할 정도로 통화목록이 가득하다.
미팅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매월 말 사장님 보고하는 KPI미팅, 월 중순에 영업부와 하는 영업 미팅, 월 초에 하는 재고 및 주문 미팅, 분기별 마케팅 플랜 미팅, 반기별 매출 및 비용 미팅, 매년 여름에 하는 브랜드 플랜이 굵직하게 이미 캘린더에 자리 잡고 있고, 무엇이든 이슈가 생기면 마케터는 빠지지 않고 모든 미팅에 참석한다.
이렇게 정해진 것만 한다면 마케팅 역시 재밌어!라는 글이 많았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건 매일 터지는 이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이런 거다.
새로 출시하는 립밤. 한두 개씩 입점되는 건 의미가 없기에 매대에 일정 수량씩 구성하여 디스플레이할 수 있도록 프리팩을 만들었다. 작업해주시는 아주머니들을 고용하여 다 포장하고 일부는 거래처에 보냈는데, 웬걸. 작업 가이드 수정 중 제품 수량이 잘못 표기되어 한 개씩 누락되어 포장되었다. 이미 거래처에서는 불만 폭주. 아직 납품 못한 프리팩은 재포장해야 한다.
신제품 출시하면서 이미 단가 조정 완료하고 계약서까지 다 완료하였는데, 제조사에서 깜빡하고 중박스 가격을 견적에서 누락했다. 중박스 단가는 전체에 녹아있는 거라 따로 계약은 불가하고, 계약서 다시 진행하면 3개월은 걸리기에 이대로라면 원래 타임라인에 론칭이 불가능하게 된다. 제조사이자 파트너사이기에 앞으로의 관계가 틀어질 위험이 있어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할 수도 없다.
계절에 따른 시즌 상품. 원래 겨울과 봄철에 어마어마한 물량이 나가는 제품이다. 제조사에서 여름에 제품을 받아주면 장려금을 챙겨준다 하기에, 어차피 곧 나갈 거 미리 물량을 받아두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따뜻했던 겨울 때문에 생각보다 제품이 안 나가고, 재고 관리 부서에서는 창고 공간이 없다고 매일 밤낮으로 전화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오만데에서 오만 이슈가 발생한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건 어떻게든 방법이 있고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립밤은 결국 내가 아주머니들과 다시 같이 가서 작업하여 빠르게 재포장했고, 기존 거래처에는 누락된 제품과 함께 증정품을 배포하여 전년대비 75프로 성장하였다. 신제품은 중박스에 컬러를 넣지 않고 무지로 진행하여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였다. 시즌 상품은 특별 인센티브를 걸었고, 그 와중에 다시 계절 및 상황이 바꾸어 유래 없는 600프로 성장을 이루었다. 분명한건 프로덕트 매니저가 되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명백히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케터의 업무는 거지 같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런 순간이 없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분명 엄청 힘들고, 적성이 아닌 사람들에겐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총괄한다는 것, 책임진다는 것, 해결해 낸다는 것, 회사를 나가도 내가 뭘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이만한 직무가 없다. 그리고 김대표가 되겠다고 마음먹게 한 데에도 이 업무들의 공이 크고, 결국엔 마케터가 평생의 업인 셈이다. 그러니 좀 힘들어도 대단하고 대단할 세상의 모든 마케터, 프로덕트 매니저들, 마케터지망생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