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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표 Sep 05. 2020

안정지향형 성과주의자가 발을 내딛는 법

나 자신에게 두드려 볼 징검다리 만들어주기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해보았을 때, 나는 ENTJ와 ESTJ가 섞여 나오는 사람이다. 실무에 집중할 때는 ESTJ, 전략에 집중할 때는 ENTJ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향은 ENTJ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유형은 "Commander", 즉 사령관이나 통솔자로 설명되곤 한다. 나는 전략을 세우고 그걸 실행하고 성과를 내는 것을 좋아하니 꽤 맞는 말인 셈이다. 그렇지만 MBTI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나는 안정성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었다.


"Do not wait for leaders, become them"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잘못 판단해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뜯어보기도, 뭉개기도 한다. (03화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원하는 게 분명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마음도 강하며, 성미까지 급해서 빠르게 시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매 순간 ‘일단 앞으로 나가자’고 하는 자신과 ‘일단 멈춰서 두드려보자’고 하는 자신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다. 그래서 30여 년 살아오면서 개발한 타협점은 "나 자신을 위한 징검다리 만들어주기"이다. 일단 징검다리를 만들어주면, ‘앞으로 가야 한다는 나’는 길이 생겼으니 나아갈 수 있고 ‘두드려야 한다는 나’도 두드릴게 생겨서 믿음을 가지고 발을 내딛게 된다.


목적지로 가는 징검다리

징검다리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중간 평가항목을 깃들인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수능 때까지 3월, 6월, 9월 모의고사를 보고 성적을 점검하며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의고사와 수능은 교육청에서 준비해주지만 인생의 징검다리는 내가 세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업을 하자"는 마음을 먹기까지도 여러 징검다리를 건너왔는데 -관련 책 읽기, 브런치에 생각하는 과정 기록하기, 브런치에 스타트업 관련 글 읽어보기, 기사 찾아보기, 백수로 사는 친구의 고충 들어보기 등- 실제로 창업을 하기까지는 더욱 확실한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검증 포인트는 "나의 창업 아이디어가 해볼 만한 것인가”였다.



 처음에는 엑셀을 켰다. 프레젠테이션을 만들 때는 A4용지나 엑셀부터 준비한다. 전반적인 flow를 엑셀에 그리고, 그에 맞는 자료를 조사하고 마지막으로 발표자료를 작성해야 하나의 메시지가 담긴 작업물이 된다. 내가 구상하는 서비스의 전반적인 흐름을 쭉 적어보니 얼추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필요할만한 자료 리스트를 적고, 구글링을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자료들이 있었고 많은 지표들이 성장 가능성을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파워포인트를 켰다. 나의 아이디어는 수의사인 아빠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창업을 한다는 결정에는 남편과 부모님의 지지도 필요했다. 시장 상황 분석, 소비자 분석, 경쟁사 분석, 서비스의 핵심기능, 소비자의 어떤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어떤 식으로 서비스를 구현할 것인지, 비전과 목표하는 방향 등을 담아서 작성했다. 그렇게 작성한 내용을 말씀드렸고, 부모님과 남편의 지지를 받았다.


 세 번째로는 Wix를 실행했다. Wix는 코딩 없이 홈페이지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사이트로 예전에 자기소개 웹페이지를 만들 때 사용했었는데, 디자인 자유도가 높고 만들기 어렵지 않다. 내 주변에는 똑똑한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론칭하고 싶은 서비스의 가상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보여줬다. 칭찬이 후하지 않던 친구가 말했다. "이거 언제 출시돼? 나 투자하고 싶어"


 네 번째로는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때마침 회사의 친한 분이 유기견을 처음 입양하면서 나에게 몇 가지 양육정보를 물어봤다. 그분은 내 서비스에 딱 맞는 페르소나 인물이었다. 그래서 서비스를 설명하고 프로토타입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고맙게도 자신의 일처럼 꼼꼼하게 피드백을 주었다. 행운이었던 것이, 와이프분이 직업상 비슷한 서비스 구조를 많이 다룬 경험이 있었고 센스 있게 수정 방향도 알려주셨다. 업데이트한 버전을 다시 보여주자, 그분이 말했다. "이거 정말 필요한 서비스예요”


 다섯 번째 징검다리는 고민이 많았다. 지금까지 의견을 물어본 사람들은 나를 알고, 나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이 서비스는 결국엔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구매"까지 할 수 있는 매력도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로토타입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적은 인원에게 소액으로 오픈해볼까 했지만, 구현할 수 있는 정도가 너무 좁아서 실효성이 있을까 싶었다. 그때 "아니면 투자를 받아보는 건 어때?"라고 남편이 제안했다. 그래서 바로 구글링을 했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예비 창업 패키지"가 마침 오픈되어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투자를 받을만한 서비스인지 확인해볼 거야. 그리고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나는 이제 진짜 창업을 할 거야" 안정지향형인 나와 성과주의자인 내가 타협하는 마지막 징검다리의 순간이었다. 보고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했다. 신기하게도 준비할수록 더욱 많은 확신을 얻어갔고, 주변에서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많은 피드백도 주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최종 선정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징검다리, 계단 오르기, 어쨌든 움직이는 일


책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어제 후배 트레이더 K에게 자신의 뷰와 다른 포지션을 갔다 손실을 보고 당황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험이 적은 트레이더에게는 너무 흔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장기적인 가격의 움직임과 단기적인 가격의 움직임이 달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경험이 쌓이면 그런 일은 확실히 줄어든다. 고통이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승리의 기쁨을 각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링에 올라본 경험에 의하면 승리는 우연인 것만 같고 패배는 실력의 결과인 것만 같다. 원칙에 따르지 않은 승리가 만든 불신일 것이다.

대다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경험은 ‘일단 해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행동에 어떤 대가가 따라오는지 깨닫는 걸 말한다. 경험에서 깨달음은 ‘사전 준비-실행-사후 반성’의 과정에서 온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행이 아니라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이다. 교육은 이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경험이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다면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트레이딩 역시 '사전 준비-실행-사후 해석'이 필요하다. 하나라도 빼놓으면 실력은 늘지 않고 결과를 운에 맡기게 된다.


"The Journey is on"

단단하게, 내가 믿음을 가지고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징검다리를 만들어(사전 준비) 건너왔기에(실행) 브런치에 글을 남기며 복기하고(사후 해석), 이제는 다음 징검다리에 대한 생각을 한다. 건너온 이상 돌아갈 수 없으니 이제는 다음 길을 또다시 잘 준비하고 건너고 복기하는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경험이 나를 만들었듯이, 앞으로의 고되겠지만 재미있는 일들이 또 나를 만들어 갈 생각에 기대가 된다. '일단 앞으로 나가자'는 자신과 '일단 멈춰서 두드려보자'는 자신이 더욱 치열하게 싸우고 열심히 경험치를 쌓아가며 결국엔 나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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