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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Feb 28. 2024

그는 나를 모른다 8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점점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었다. 특히 눈앞에 앉아 있는 체리콕 아니 그녀가 함께 있어서 그런 거 같다.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난 사이지만 이상하게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만 같아.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어지러운 건 술 탓일까? 정리되지 않는 내 마음 탓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그녀가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한다.


“갔다 와요.”


잠시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음식 값을 계산하기로 했다.


“카드로 결제할게요.”

“네.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계산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파 묻었다. 올라오는 취기 때문에 살짝 덥고 몸도 무거워졌다. 여신 님이 돌아오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는 그녀를 여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들킨다면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너무 잘 먹었어요. 음식도 맛있고 와인도 좋았어요.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까 취하네요. 전에는 이 정도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일에 치이다 보니 삶의 즐거움을 많이 잃어버렸나 봐요.”

“체리콕 님도 취기가 돌아요? 사실 저도 그래요. 제가 술을 좀 못하는 편이기도 해서. 그래도 오늘 저하고 같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눠주셔서 고마워요.”

“이런 자리는 언제나 환영이죠. 아참 계산해야죠? 잘 먹어서 좋긴 한데 자꾸 부담스러워서 그냥 우리 반반할까요?”

“그럴 줄 알고 미리 계산했어요. 하하.”

“어? 벌써요? 아.. 잠시 자리 비운틈에 한 거구나..”


더치페이를 하겠다는 그녀가 더 좋아졌지만 솔직히 첫 만남에 이 정도는 내가 내고 싶었다.


“그럼.. 우리 바에서 딱 한 잔씩만 더할래요?”

“바요?”

“네. 술을 한 잔 마시고 나니까 조금만 더 마시고 싶어 졌어요. 우리 데낄라 한 잔만 마실까요? 혹시 독한 술은 별로면 얘기하세요.”


데낄라라.. 이름은 알지만 마셔본 적이 없다. 많이 독한가? 그러고 보니 예전 신입 환영회 때 3차에서 팀장 놈이 마시라고 해서 건네준 술을 마시고 코피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술 이름이 뭐였더라.. 바. 바카. 그렇지 바카디. 그 정도로 독한 술이면 곤란하긴 한데.


“제가 좀 촌스러워서 그런데 혹시 데낄라가 어느 정도로 독한 가요? 예전에 바카디 마시고 힘들었던 적이 있어서.”


괜한 얘기를 꺼냈을까? 애써 그녀가 자리를 마련하겠다는데 굳이 이렇게 초를 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었고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바카디는 저도 안 마셔봤는데. 데낄라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저도 많이 마시면 큰일 나겠지만 한 잔 깔끔하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소량이라 배도 덜 부른 거 같고. 느끼했던 뱃속도 청량해지는 느낌? 한 번 이참에 경험해 봐요. 제가 살게요!”


이럴 땐 더 이상 앞뒤 재는 게 노매너다. 무조건 가자!


“좋아요. 믿고 갈게요! 그래도 여기가 홍대니까 바는 많을 거 같네요.”

“혹시 아는 데라도?”

“아는 데는 없는데 한 번 찾아볼까요?”

“네!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요.”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살짝 올라왔던 취기를 달래주는 듯하다. 그녀도 바깥공기를 크게 들이 마시더니 내뱉는다.


“너무 기분 좋아요. 얼마 만에 느끼는 기분인지. 그거 알아요? 나 오늘 나오기까지 엄청 망설였어요. 혹시라도 만나서 좋았던 이미지가 깨져 버리면 어떡하지? 싶어서 밤새도록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차라리 일이 생겨서 못 나간다고 할까 싶기도 했고. 근데 나오길 잘한 거 같아요. 게임 속 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그녀가 하는 얘기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왠지 이대로면 우리는 최소한 좋은 친구 사이라도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친구로만 지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감정이라니.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그녀가 저절로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바를 발견했다. 걸으면서 바에 대한 검색을 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리 있던 차에 차라리 잘 된 거 같다.


“여기 바! 어때 보여요?”

“들어가요! 아니다 싶으면 나오죠 뭐.”


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어두컴컴한 조명의 조금은 오래된 듯한 바가 나타났다. 오래된듯한 공기가 느껴져 살짝 탁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조도와 인테리어가 나쁜 편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데 어때요?”

“저야 체리콕 님만 괜찮다면.”


그렇게 바에 들어갔을 때 손님은 많지 않았다. 살짝 노출 있는 옷을 입은 여성 바텐더가 있는 다찌석에 손님 한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전부였다.


“데낄라 두 잔 주세요.”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데낄라를 가져왔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벨 눌러주시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네에.”


생전 처음 시켜보는 데낄라 잔은 생각보다 조그마했다. 그리고 옆에는 라임 반 조각과 맥심 커피 가루, 약간의 소금이 그릇에 담겨 있다.


“자 잘 봐요.”


그녀는 익숙한 듯 검지와 중지 사이인 범아귀에 커피 가루를 조금 올려놓고 라임을 살짝 짜서 데낄라에 넣고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때려 넣었다. 


“크어어어억!”


뒤이어서 범아귀에 있던 커피가루를 혀로 핥아먹더니 남아 있던 라임을 입으로 쭉 짜 먹었다.


“와.. 이맛이죠.”


데낄라를 마시더니 그녀는 한껏 기분이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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