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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Mar 04. 2024

서울행 4

바깥으로 나오니 숨이 트이는 거 같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은 점점 차올랐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던 우울한 생각이 사라져 가자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산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조금만 쉬어 가자.’


가쁘게 숨을 내쉬며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의자로 뛰어가다가 앞에 파여 있는 걸 못 보고 그만 발이 걸려 넘어졌다.


”아얏!”


큰일이다. 걸려 넘어진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문제는 발목이 접질린 거 같이 욱신 거린다. 최선을 다해 일어나려 해 보지만 잡고 일어날 게 없어 버둥거릴 뿐.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팔을 잡고 일으켜줬다. 누군지 확인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젊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발목을 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 땅으로 홱 하고 돌렸다.


”저. 발목 괜찮으세요? 멀리서 봤는데 심하게 접질리신 거 같아서.”

”아.. 괜찮지 않을까요? 아.. 아얏.”


다친 발을 땅에 대고 힘을 싣자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진다. 병원을 가봐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안 괜찮으시네요. 제가 헬스 트레이너인데 괜찮으시면 발목 잠깐 봐드려도 될까요? 전문 의료지식이 있는 것까진 않은데 상태 확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죄..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서서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 저기 벤치까지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너무 힘드시면 업어드릴 수도 있긴 한데 그건 좀 싫어하실 거 같아서.”

”아 업히는 것까진 좀 그렇고.. 부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아 깨끔 발로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혼자였으면 절대 움직이지 못했을 거 같다. 깨끔 발의 영향 때문인지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신발과 양말을 차례로 벗기고 그는 내 발목을 맨손으로 부여잡았다. 혹시나 냄새가 나면 어쩔까 싶어 민망했다.


”저.. 저기..”

”네?”

”아니 제가.. 달리기를 해서 발에 땀이 났을 텐데..”

”아? 괜찮아요. 손이야 닦으면 되죠. 그나저나 발목이 많이 부었는데 혹시나 인대에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심하게 부어서 제가 확인하는 것보다는 병원을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잠시 동안이라도 편하실 수 있게 테이핑이라도 좀 해드릴까요?”


갑작스럽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그냥 갑갑한 마음에 달리기를 했을 뿐인데. 발목은 다치고 웬 낯선 남자에게 맨발을 보여주고 있다니. 그런데 이상한 건 낯선 그가 베푸는 호의가 싫지는 않았다는 거다.


”테이핑은 마무리됐는데 혹시 몰라 조금 느슨하게 했어요. 괜찮다면 병원까지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아니면 혹시 다른 가족이나 친구분에게 연락이라도 해보시겠어요?”

”아.. 제가 서울에서 자취 중이라. 택시 불러서 혼자 가볼게요. 저 때문에 괜히 시간 많이 쓰셨는데..”

”그런 건 걱정 마세요. 시간이 아직 충분해서요. 그럼 병원까지 데려다 줄게요. 아참 제 이름은 인호라고 해요.”


인호. 낯선 서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서 왠지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병원까지 도착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몸조리 잘하시고요.”

”저기. 인호 님?”

”네? 뭐 더 도와드릴 거라도?”

”아니요 충분해요. 그게.. 감사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겨우 꺼낸 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인호는 피식 웃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도왔을 거예요. 그래도 이 정도라서 다행이죠.”


크게 다쳤을 거라 생각하며 병원에 왔지만 다행스럽게도 인대가 살짝 늘어난 정도라고만 했다.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넘어진 거에 비하면 다행이랄까. 혹시라도 뼈가 부러졌을까 봐 걱정이 컸던 게 사실이다.


”채원 씨라고 했죠? 그렇게 고마우면 밥이라도 한 끼 살래요?”

”밥..”


겨우 밥 한 끼 사달라는 말에도 생활비가 걱정돼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을 해본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밥도 못 사고 미적대는 모습에 환멸이 느껴졌다.


”아.. 부담드리려던 게 아닌데. 꼭 밥 사지 않아도 돼요.”

”아니에요. 밥! 살게요. 우리 밥 먹어요. 근데 제가 아는 밥집이 별로 없는데.. 분식 먹어도 괜찮을까요?”

”분식이면 충분하죠. 저 분식집 엄청 좋아해요. 잠깐 폰 줘 볼래요?”

”네?”


인호는 내 손에 들린 폰을 가리켰다.


”아? 여기요.”

”잠시만요.”


폰을 가져간 인호가 번호를 누르더니 자기 폰에 전화를 건다.


”제 번호 저장하시면 돼요. 제 이름은 김인호예요.”

”아.. 네에. 전 심채원이에요.”

”이쁜 이름이네요.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요? 제가 일만 아니면 데려다줬을 텐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걸요.”

”혹시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해요. 부담 가지지 말고요. 갈게요.”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낯선 서울에서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받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마음 같아선 좀 더 맛있는 음식으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순 없었다.


’분식이 뭐야. 분식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얘기했던 모습이 떠올라 다시 부끄럽다. 그리고 인호가 생각났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


***


택시를 잡아타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가 참 길다고 느껴진다. 다시 갑갑한 고시텔 공간으로 들어와 붕대에 감긴 다리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린다. 그냥 잠시 갑갑한 마음을 털어내고 싶었을 뿐인데 돈만 돈대로 쓰고 다리도 다치고. 대체 이 꼴이 뭐야.


[알림음]


[채원 씨 잘 도착했어요? 집에 냉찜질할 수 있는 거 있으면 좀 하세요. 인대 다쳤을 땐 냉찜질이 최고예요. 물론 주의사항에 대해 병원에서 잘 알려줬겠지만 그래도 몸 꼭 챙겨요. 그러고 보니 우리 언제 만나자고 약속을 안 잡았더라고요. 전 미리 얘기만 해주면 어느 정도 시간 조절을 할 수 있으니 하루 전에만 얘기 주세요. 그럼.]


그러고 보니 약속도 잡지 않았구나. 언제 보자고 해야 할까. 막상 약속을 잡으려고 하니 부담스럽기도 하고 만나서 대화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문자를 씹을까? 그러다 고개를 휘저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오늘 감사했어요 인호 님. 제가 아직 다리가 좀 불편하긴 한데 하루 정도 자고 나면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자고 일어나 봐야겠지만요. 혹시 그러면 3일 뒤 주말에 제가 알바가 없는 날인데 그때 점심 어떠세요? 괜찮으시다고 하면 제가 식당 위치 공유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내자 팽팽해져 있던 긴장감이 탁하고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긴 하루였어. 잠시 좀 쉬어야겠어.’라며 자리에 눕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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