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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3시간전

소비 요정이었던 건에 대하여

67 걸음

20대에 빠졌던 취미 중에 이어폰 모으기가 있었다. 음악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마약(?)이라며 음악 없인 못 살기 때문에 시작한 취미는 아니었다.


사실 이어폰으로 주로 하던 건 그냥 귀에 꽂고 있는 게 전부였다. 익스테리어 같은 거라고나 할까?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취미였다. 물론 이어폰 꼽고 있는 게 트렌드여서 뒤처지지 않기 위함도 아니었다. 당시 내가 모으던 건 유선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블투 이어폰처럼 깔끔해 보이지도 않았다.


당시 고가 이어폰을 사면 하는 행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에이징]이다. 일단 에이징이 어떤 건지 설명을 해보자면 단어의 의미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다.


Ageing : 노화를 뜻함. 응?
Burn in : 이어폰 또는 헤드폰 초기 구동 시 길들임을 뜻함


에이징의 의미를 찾아보다 알게 됐는데 지금까지 잘못된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에이징 = 번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거 같다. 하지만 워낙 커뮤니티에서 에이징이라는 단어를 귀에 박히게 들어서일까 아직은 번인이 입에 달라붙질 않는다.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리 공신력이 있을 거 같지도 않은 얘기지만, 당시 주로 정보를 얻던 커뮤니티에서는 번인을 필수 과정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번인의 과정을 거쳐야지만 고가의 기기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혀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고 했던가.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라서 가끔 어떤 이는 에이징을 [뇌이징]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하다고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하지만 취미라는 게 꼭 가성비나 기능에 중점을 두기만 하는 건 아닐 테니. 단순히 모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줬으니 그거면 됐지 뭐. 대신 취미 덕분에 주변에서는 쓸데없는데 돈 쓰는 덕후 정도로 취급받았다. 사실 덕후 정도 취급받으려면 훨씬 더 고가의 이어폰을 수집하거나 디테일한 지식이 필요했는데 단순히 이어폰 몇 개 모았다고 그런 칭호를 얻은 건 다소 과한 대우였다고 생각한다.


"그냥 님이 오덕 같이 보였다는 건데 뭔 의미를 두고 그래요."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모든 돈 쓰는 취미가 그렇듯 이어폰 모으기도 어느 순간부터 슬슬 지겨워졌다. 단순 멋 부림 용으로만 모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막상 다른 사람 눈엔 별로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거 같았다. 그냥 나 혼자 상상 속 멋에 취해 있었던 거다. 게다가 하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는 염증 같은 게 자주 생겼었고 이명현상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모았던 이어폰은 염가처분해 버렸다. 당시엔 당근대신 중고나라나 커뮤니티의 장터를 이용해야 했기에 사기의 위험도 무릅써야 했다. 뭐 당근을 쓴다고 해서 완전히 사기로부터 안전한 건 아니지만 당시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기천국이었다.


어떨 땐 구매자와 만나자마자 "네고 안 되나요? 저 돈 없는 학생이라서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면 판매자인 나도 똑같이 "사실 저도 원룸 사는 학생입니다. 월세가 밀려서 파는 거라 죄송합니다. 길거리로 나앉을 순 없으니까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가난을 무기 삼아 상대의 흥정을 막는 기술. 당시엔 올려놓은 판매가격에서 한 푼도 네고해주지 않는 걸 미덕이라 여겼던 거 같다.


이쯤에서 물어볼 때가 된 거 같은데.


"잘 아시네요? 대체 오늘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이런 시답잖은 거 보려고 시간 써야 해요? 의미도 없고 시간은 아깝고.. 그놈의 정만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텐데."


오늘의 글마카세가 이 정도에서 끝날 리가 없지 않겠나? 조금만 진득하니 허송세월이라 생각하지 말고 귀엽게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귀여워 보이고 싶은 욕심 좀 제발 버려요. 욕심이 아주 선 세게 넘네요!"


자~ 티키타카는 이 정도로 하고.




아직까지 못 판 이어폰이 있어서 사달라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물론 조용히 몇 년째 처박혀 있는 이어폰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어폰 얘기를 꺼냈더라.. 취미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원래 쓰려던 건 현명한 소비생활 또는 생활의 격을 높여주는 소비하기를 다뤄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살면서 그런 적이 없다 보니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그럼 그렇지.


이어폰 모으는 취미를 가졌을 때 내 고민은 늘 하나였다.


가성비 좋은 제품 A, 워너피 제품 B를 놓고 저울질하는 것. 이유는 당연히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가성비와 워너비 사이에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 결정은 늘 [가성비 > 워너비]였고 이어폰을 살 때부터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사고 싶었던 이어폰은 B였기 때문이다. 애써서 마음을 달래도 봤다.


'A도 나쁘지 않아. B에 비해 좀 부족할 뿐 충분히 괜찮은 제품이란 말이야.'


그런데 어디 사람 마음이 쉽게 접어지던가. 결국 시간이 더 걸리느냐 아니냐의 문제였을 뿐 결국 몇 년이 지나서까지 내 머릿속엔 B가 맴돌았고 결국 사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돈은 돈대로 더 쓴 셈이 되어버렸네.




이어폰 이후로도 비슷한 고민은 계속됐다. 어떤 소비를 함에 있어 버릇처럼 존재해 왔던 가성비와 워너비 사이의 문제는 지겹도록 따라다녔다. 다시 또 예전처럼 몇 번의 실수를 했다. 워너비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후회했고 시간이 지나서 워너비 제품을 구매하는 패턴의 반복.


'어쩜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난 처음부터 워너비 제품을 사야 되는 사람이구나‼️"

"아니 이 인간이? 돈은 어디서 나서!"


아차차..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소비는 되도록 아내를 피해서 하는 걸로. 최대한 아내가 잘 모르는 제품을 별로 비싸지 않은 것처럼 흘려서 얘기하는 게 포인트.


그 뒤로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내게 걸맞은 격을 가진 제품을 구매했고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역시 이 맛에 소비하는 거지.'


뭔가 이상한 결론에 이른 거 같지만 소비를 할 때 만약 나와 같은 딜레마에 자주 빠지는 분이 있다면 확실히 얘기해 줄 수 있다.


"한 번에 원하는 걸 사세요. 가성비고 뭐고 따질 시간에 그냥 한눈에 꽂힌 제품으로 한 번에 지르세요. 어쩌면 그게 가장 돈 아끼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뭐 좀 사고 싶은 건 많이 샀어요?"

"..."


안타깝지만 이제 난 아이쇼핑을 즐겨한다. 자발적이라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 그리고 사고 싶은 워너비 물건이 많이 줄어들었다. 결코 사지 못하게 해서가 아니다. 정말로 물욕이 많이 줄어들었다. 진짜다.. 참 다행이라고 밖엔 설명을 못하겠네 하하 :)


그렇지만 다른 이에겐 적극적으로 소비를 권장한다. 그렇게 대리만족이라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난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정말이다. 부디 살 수 있을 때 많이 지르고 만족감 있는 생활하시길. 


지나고 보니 지름에도 때가 있는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쓰다 보니 마음이 심란해지네. 비록 40대가 되어서도 원하는 걸 맘대로 막 사진 못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행복해질 거다. 행복해지겠지.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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