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걸음
오늘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은 후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슨 글을 쓰면 좋을까?'
두뇌풀가동‼️
단편적인 소재가 여러 개 스쳐 지나갔다.
'음.. 이걸로 이야기 쓰기엔 좀. 이 소재는 저번에 한번 써먹었던 거고. 커피나 한잔 때리자.'
이상하다. 생각을 깊이 하면 길이 보일 거라 믿었는데 그냥 머리만 아프다.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다가 즉흥적으로 쓸 때가 더 잘 써지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 무더위 때문인지 유일하게 기대던 즉흥성도 많이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위기다.
잘 안 써질 땐 일단 커피부터 한잔 마신다.
언제부터 이 쓰디쓴 검은 물을 마시게 된 건지. 처음 아메리카노를 접했을 때 든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돈 주고 사 마신다고?"
하지만 이제는 커피가 없으면 쉽지 않다. 딱히 엄청난 맛을 내뿜는 거 같지는 않은데 어느새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일평생 담배는 쳐다도 안 봤는데 어쩌면 끽연자들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딴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커피가 다 내려졌다. 잔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본다. 하얀 화면(혹은 까만 화면) 상태에서 아무 흔적 없는 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깜빡이는 커서는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손가락을 한번 움직여봤다.
'첫 줄이라도 써볼까.'
[오늘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은 후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라고 써봤다.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기도 했고 일단 써 놓으면 그 문장부터 시작해 다른 문장으로 이어질 거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글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살짝 느껴진다.
'왠지 오늘 글은 잡생각을 끄적일 거 같구만.'
내 하루를 들여다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간다고 해봤자 운전하는 게 전부. 그러다 힘들면 침대에 드러눕는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휴대폰으로 소설을 읽는다. 집중력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몇 화 정도 읽다 보면 살짝 지겨워져서 휴식을 취해본다.
그러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뭐 먹을까?'
하루 중 가장 진지한 고민 시간이 찾아왔다.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예전 투자자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원래 가난뱅이었던 데다 막입이라 아무거나 한 끼 때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어. 생각해 보니 남은 생의 시간이 언제까지 주어질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결심했지. 한 끼를 먹더라도 나를 챙기는 음식을 먹도록 하자라고."
그때는 투자자의 말을 들으며 '그건 당신이 돈과 시간이 여유롭기 때문이겠지.'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일개미인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말이라고 여겼다. 오늘도 내일도 그저 주어진 점심시간에 맞춰 가성비 좋은 한 끼를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리 잡은 식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천천히 먹고 싶은 나의 바람과 달리 5분 컷 식사를 하곤 한다. 덤으로 얻은 고쳐지지 않는 위장병은 영광의 상처인 듯.
다시 진지한 식사 고민의 순간으로 돌아왔다.
'나를 챙기는 음식은 뭐가 있을까?'
한참 생각하다 보면 결국 외식을 선택하곤 한다. 나가서 사 먹는 음식이 나를 챙기는 음식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직접 해먹을 생각하니 급 귀찮아져서다. 외식을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장벽이 존재한다.
"오늘.."
"그냥 집에서 먹어."
말도 꺼내기 전에 아내는 내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 뒤는 따로 기재하지 않겠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도 있고 굳이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사 먹고 싶지는 않아 져서도 있겠다.
우여곡절 끝에 점심을 해결했다. 자~ 이제 뭘 할까.
다시 또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본다. 여전히 깨끗한 빈 화면 속에선 커서만이 나를 반겨준다.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깜빡거리는 커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시험기간 중 공부는 하지 않지만 독서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취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여하튼 취했다. 글은 쓰지 않지만 앉아서 있는 내 모습이 멋져 보인다. 자의식 과잉의 순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전히 화면 속에는 한 줄의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오늘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은 후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점심까지 먹은 마당에 아직도 아침 먹은 뒤의 한 줄만 남아 있다니. 문제가 심각하다. 흘러간 내 시간과 무관하게 글은 여전히 아침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글의 시간도 함께 흘러간다면 정말 좋겠어.'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직접 쓰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혹시 꿈인가?"
해야 될 일을 피해서는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음을 알기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어도 자리에 앉아 다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다.
썼다 지웠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어째서인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딱히 대단한 문장을 쓰려는 것도 아닌데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꼬르르륵-
"미쳤네.. 벌써 저녁 시간이야?"
한 거라고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게 전부인데 거짓말처럼 저녁 시간이 되어버렸다.
다시 또 중요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저. 녁. 고. 민.
이때만큼은 집중력이 급격히 올라간다. 기운 없던 몸에 활력이 생기더니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떠오른다.
'내가 오늘 움직이긴 했던가..?'
칼로리 소모라고는 기초대사량만큼 밖에 안 이뤄졌을 텐데 어째서 또 배가 고픈 건지.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다시 저녁을 먹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째려본다. 째려본다는 표현이 맞는 게 글이 써지지 않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노트북 때문이라는 듯 매섭게 쳐다봤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어떻게든 쓰고 만다.'
이쯤 되면 자존심 문제다. 몇 시간이 넘도록 화면을 쳐다봤는데 한 줄 쓴 게 다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때 머릿속의 또 다른 내가 생각했다.
[나는 두 번째 문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문장은 '무슨 글을 쓰면 좋을까?'라고 쓰면 좋을 거 같다.]
으응?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중계하듯 머릿속에서 내 손가락에 명령을 내리자 흐리멍덩한 눈으로 빈 화면에 끄적였다.
[연달아 세 번째 문장도 써보면 어떨까? '두뇌풀가동‼️'이라고 쓰도록 하자.]
스스로에게 조종을 받으며 세 번째 문장이 완성됐고.
[다시 생각했다. 네 번째로는 이게 좋겠어. '단편적인 소재가 여러 개 스쳐 지나갔다.']
다시 또 네 번째 문장이 쓰였다. 여전히 검은 글씨보다 빈 여백이 훨씬 많은 상태였지만 뭐라도 쓰고 나자 죄책감이 덜어졌다.
[이제는 뭘 쓰면 좋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오빠! 과일 먹어."
"아앗‼️ 한창 좋았는데."
"뭔 소리래. 맨날 띵가띵가 놀고 있으면서. 과일이나 먹어."
그래 과일이나 먹자. 과일은 비타민이 풍부하니 먹고 나면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글을 쓸 수 있겠지?
뒷일은 미래의 내게 맡겨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과일을 먹으러 총총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자기 전에는 다 쓸 수 있겠지? 그렇게 될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뭐.'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입안에 들어올 상큼한 과일 맛이 기대돼 군침이 싹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종장을 향해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미완의 글만 내가 떠난 노트북 화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부디 무사히 오늘의 글이 써지기를.'
나의 바람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