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걸음
언제부터였을까?
반말을 거의 안 쓰기 시작했던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더라..
존댓말을 쓰는 이유? 솔직히 말하면 내가 편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오래된 친구나 서로의 합의하에 말을 놓은 사람은 예외로 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난 존댓말을 쓰고 있다.
10년 이상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이제는 그냥 존댓말 쓰는 게 반말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그런 내가 신기해 보였는지 아내가 한마디 했다.
"난 동갑 친구는 그래도 맘이 편해서 그런가. 말이 금방 놔지던데? 오빤 아닌가 봐?"
"음. 존댓말도 충분히 편한데?"
"상대방은 아닐 수도 있을 걸? 벽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뭐 알아서 해."
벽.. 벽을 치고 있었던가.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네.
반말하던 사이의 지인이 있었다. 같은 회사 소속이었고 우리는 직급도 동일하고 나이도 같아서 좀 더 빨리 친해졌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승진을 하면서였다. 하필이면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회사였기에 타인이 볼 때는 반말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그래도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미묘한 간극이 벌어지며 우리 사이에도 균열이 생겨버렸다. 알 수 없는 자존심과 시기가 공존하며 발생한 이상 기류로 인해 전과 같은 친근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회식이 잦은 회사를 다닐 때면 술의 힘을 빌어 말을 놓는 경우가 더러 생겼었다.
"와하하! 뭐야 동갑이었어?"
"진짜? 야 말 놔!"
"그래. 우리 오늘부터 친구 먹는 거다?"
술이 있는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도원결의 부럽지 않을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리 길게 유지되지 않았다. 고작 다음날이 돼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아.. 안녕.. 하세요?"
"하하.. 어제 잘 들어갔어? 요?"
지금 생각해도 어색 어색하다. 멋쩍은 미소와 함께 반존대를 잠깐 섞다가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아갔다. 술의 힘을 빌었던 관계는 술이 사라지면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나이 많은 선배 중에 친분이 없음에도 다짜고짜 반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뭐.. 워낙 나이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그러려니 해서 큰 타격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아닌 타인과 그 선배와의 관계에서 터져버렸다.
신입으로 입사한 직원에게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바꿔보려던 게 실수였다. 본인은 유쾌했지만 상대방은 불쾌했기 때문이겠지.
"아니! 지금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흑.. 본사에 전부 말할 거예요. 저 그리고 사표 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 사건 이후 선배는 절대로 반말을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거의 20여 년 만에 닿은 연락.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통화를 나누기로 하고 살짝 긴장했다. 당시엔 까불거리기도 하고 몸의 대화도 조금은 나눴던 각별한 사이었었는데.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는지.
"안녕?"
"어! 안녕? 오랜만이네? 연락 끊고 지냈더니 좋아?"
"응? 뭐래!"
걱정과 달리 반말로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도 그도 20대 초반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어색하지 않았다 하면 완전히 거짓말 이겠지만 그래도 편함이 더 컸다.
한 가지 두려운 건 있었다.
연락 없던 친구 사이에 그것도 오랜만에 연락을 한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혹시 내가 그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칠까 봐 두려웠다. 그 친구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소심한 나로선 그렇게 비치지 않게 참 많이 신경 썼다.
다행스럽게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 줄 수 있었고 이후 우리는 가끔씩 통화를 나누고 있다.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불편했다. 누군가에게는 반말을 쓰고 누군가에겐 존댓말을 써야 하는 상황 자체가 사소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쿨한 사람이었다면 크게 개의치 않을 일인데, 예민하다 보니 별거 아닌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반말이 나쁘고 존댓말이 좋다는 식의 이분법을 적용하려는 건 아니다.
실제로 좋고 나쁘고 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한국 문화의 특성상 사용 대상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긴 하다. 이 규칙을 무시하고 엉뚱하게 사용할 때는 분명 문제소지가 되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그냥 존댓말이 편해졌다. 특별히 벽을 치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운해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코 그런 의도는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 하고는 반말을 한다.
"뭐 내가 반말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뭐 싫어?"
"아니.. 편한 대로 쓰세요."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넵."
"뭐 어쩌라고?"
"..."
내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아내뿐이다. 그래도 즐거우니까 된 거 아닐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계속 존댓말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