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하고 무탈한 하루를 소망해 본다.

76 걸음

by 고성프리맨

오랜만에 지인과의 시간을 가졌다. 서로 사는 곳까지의 거리가 있다 보니 우리의 만남은 화상으로 이뤄졌다. 물론 직접 마주하고 대화 나누는 것보단 부족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랜선 미팅은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부터 익숙하게 사용했던 터라 딱히 거부감이 생기진 않는다. 화면 속에 비치는 어색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의 주제는 단순했다. 시시콜콜한 잡담에 가까웠다.


"요즘 글 쓰는 거 계속해?"

"하고 있어요."

"원래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가?"

"그건 아닌데. 시간이 생기니까 쓰게 되네요."


첫 시작은 글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형은 제주도 생활 계속할 거예요?"

"뭐, 딱히 이사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일단은 살아볼 생각."


나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떠나 어딘가에 새로 정착해서 살고 있는 중이다.


"OO맨은 회사 생활 괜찮아요?"


아 정확히 몇 명이라고 말은 안 했었던가. 나를 포함해 총 세명이다.


"음.. 괴롭게 만들던 CTO 퇴사하고 나선 다니기 편해졌네요."

"오? 다행인데요?"


가볍게 한 사이클이 돌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때는 우리 셋 다 회사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한 명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 겉돌듯 하지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서로가 내비쳤다. 최근 관심사를 비롯해 취미 생활, 미래계획 등. 말을 주고받는다. 뭐가 좋고 나쁘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이미 각자의 삶이 서로의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 아닐까?


문득 예전 우리가 처음 알게 됐던 그때가 떠올랐다.


나이는 먹었지만 우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과거로 돌아갔다고 느끼곤 한다.


뒤섞인 감정과 추억 속에서 나는 부유하고 있었다. 입으로 말을 꺼냈지만 어떤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음식으로 치면 익숙한 맛이 나야 정상인데 어째서인지 맛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1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늦은 시간에 나눈 대화인만큼 화면 속에 비친 모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아쉬웠다.


"우리 30분만 더 대화하고 잘까요?"

"그래."

"넹."


대화의 주제는 이미 다 소진되었다. 단지 아쉬움, 미련,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르며 모두를 붙잡았다.


이윽고 추가로 주어진 30분도 지나갔다.


"이제 잘까?"

"네. 다음에 봐요~"

"좋은 밤 보내세요!"


방금 전까지 모니터를 수놓았던 우리의 얼굴은 사라지고 하얀 종료 화면만이 남았다. 분명 피곤한 상태였는데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많이 변했구나.'


모르긴 해도 나에 대해서도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한 건 사실이지.


그래도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다. 변한 걸 인정하며 다소 삐걱 거리는 가치관까지도 일부 공유할 수 있는 사이. 그런 관계만으로도 감사하다.


관계에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의 역할이 존재하는 거 같다.


내가 맡는 역할은 주로 MC. 우습게도 정적을 잘 못 견디는 성격 탓에 횡설수설하듯 자꾸 진행을 하려 한다. 정적도 이야기의 일부분임을 인정하지만 막상 내게 닥쳐오면 안절부절못하는 편이다.


그에 반해 두 사람은 초연하다. 불필요한 말을 애써 포장하거나 늘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동경했다. 어째서 나란 사람은 초연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건지.


대화를 나눴을 때보다 끝마치고 나서 생각이 더 많아졌다. 바둑은 둬 본 적 없지만 복기의 과정을 진행하듯 있었던 대화를 되새김질해봤다. 흘러버린 과거를 바꿀 수 없음에도 이렇게 늘 지나간 대화를 복기해보곤 한다.


결과는 비슷하다. 복기의 과정 속에서는 얕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아쉬운 점은 늘 생긴달까.


'다음에는 조금 더 침착해지자.'


이렇게 다짐해도 다음이 다가온다면 비슷한 아쉬움은 남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언제나처럼 다짐해 본다.


어느덧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다.


복잡하게 생각해 봤자 풀릴 일은 하나도 없을 텐데 생각을 하다 보면 꼬이기 시작한다. 한번 꼬인 생각이 엉키기 시작하면 시간을 잡아먹는다.


'정신 차려야 해. 차라리 잠이나 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눠서인지, 밤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기분이 멜랑콜리해 져서인지.


억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역시나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잠이 들기까지 이리저리 뒤척여보기도 하고 긴 영상을 틀어놓고 청음도 해봤다.


자야 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잠이 안 오듯, 백색소음처럼 틀어놓은 영상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결국 긴 영상의 끝까지 들었다.


다시 한번 시간을 살펴보니 40분이 지나있었다. 이쯤 되면 초조해진다. 영상을 하나 더 틀어서 잠을 청해볼까 싶었지만 접었다. 자칫하다간 새벽 2-3시까지 잠을 못 자는 상황이 발생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어서다.


'나는 불안한가?'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걱정의 기운이 올라오려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잠이 잘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오빠‼️ 안 일어나? 애들 밥 차려줘야지."

"..."

"아니 이 인간이 밤늦게까지 뭐 하다가 진짜!"

"으음.. 몇 시야?"

"핸드폰 가지고 있으면서 눈으로 직접 봐."


7시 30분.. 일어날 시간이군. 언제 잠들었더라?


떠들썩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거실로부터 들려온다. 그리고 출근 준비하는 아내의 분주함도 느껴졌다. 이젠 나만 일어나서 활동하면 되는데. 어제의 여파 때문인지 몸이 상당히 찌뿌둥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소원했던 대로 어느 순간 잠들었다 눈이 떠졌다는 것.


노답이라 생각하며, 불면증 때문에 괴로워했던 시간이 지나고 쾌적함이 느껴졌다. 좀 더 푹 잘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은 일찍 자자~"

"지금 일어나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


괴로웠던 새벽 시간이 지나고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결국 올 것은 어떻게 해서든 오는 거구나.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 오늘도 한번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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