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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주해졌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좋기는 한데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조금씩 하느라 뭐 하나 제대로 진척되는 게 없다. 이 와중에 구매대행 업무는 조금 소홀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어 동네 산책을 한 바퀴 하는 중이다.
‘이상해. 일이 생기면 그걸로 모든 게 해결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거 같단 말이지.’
당장 다음 주부터는 고시텔 운영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커진다. 막상 수락할 때만 해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부담감과 두려움이 합쳐져 버렸다.
농산물 판매도 상황은 마찬가지. 자신 있게 디자인 작업부터 해보겠다고 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업체도 섭외하지 못했다.
‘잠깐.. 왜 꼭 업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예전에 협업하던 디자이너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람 제시카. 그나마 대화를 좀 나눴었지. 이제는 오랜 기간 연락 안 했더라도 먼저 메시지 보내는 건 무섭지 않다. 그래 디자인부터 일단 시작해야겠어. 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거 같다. 세세하게 조금씩 진행은 되고 있지만 큰 틀에서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다시 또 올라오려는 두려움을 물리치려는 듯 빠르게 연락처에서 제시카를 찾아본다.
[안녕하세요. 제시카! 잘 지내시죠? 정말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예전 결혼식 이후로 처음 연락하는 거 같네요 ㅎㅎ]
일단 메시지는 보냈다. 연락이 온다면 한번 잘 얘기 나눠보면 될 것이다. 다음 할 일은? 눈치 없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린다.
‘식사 시간은 기가 막히게 챙긴다니까 허허.’
집에 있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왜? 운동 나간 거 아니야?”
“혹시 점심 먹고 싶은 거 뭐 없어?”
“엥? 집이나 들어와. 뭘 자꾸 사 먹으려고 그래 백수가!”
아.. 나 백수구나. 아니다. 곧 일을 시작한다.
“너무 빡빡하네. 담주부터 고시텔 운영하는 거 알잖아. 시간도 부족해질 거 같은데. 희수 없을 때 외식 한 번 하자. 그래 데이트!”
“데이트는 무슨.. 음. 알겠어. 어딘데?”
“금방 집으로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 놔.”
“알았어. 좀 이따 봐.”
밥부터 먹자.
—
“아 무슨 브런치야.. 난 국물 있는 거 먹고 싶었는데.”
“뭐야 나보고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보라며?”
“그건 그렇지.. 아니야 그래 먹자.”
아내는 빵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오랜 시간 국물도 단련된 내 위장은 국물을 원하지만 어쩌겠나. 가끔은 아내가 좋아하는 것도 먹어줘야지. 아내는 눈을 반짝이며 메뉴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주문을 끝마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겠다. 신나.”
“자주 좀 올걸 그랬다.”
“자주 오면 우리 거지됩니다. 근데 또 무슨 걱정 있어? 오빠는 왜 맨날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마음속이 음침한 건가..”
“야! 또 내가 뭘 그렇게 음침하다고. 그냥 생계 걱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민이 많은 거지.”
“그래도 잘됐잖아. 당장 월급 받을 수 있는 일도 생겼고, 삼촌들하고도 일할 거지, 구매대행도 하잖아. 물론 돈은 안되지만..”
“일을 하기는 하는데 당장에 돈이 바로 들어오지가 않으니까 걱정인거지.”
“좀만 기다리면 내 퇴직금도 들어오잖아.”
아! 퇴직금. 퇴직금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얼마나 들어올까?”
“뭐야. 부담스럽게 그 눈빛은. 그래도 한 몇천은 될 거 같아. 다닌 세월이 있으니.”
“생각보다 많은데!”
“탐내지 마쇼. 근데 고민이긴 해. 그냥 갖고만 있으면 생활비로 쓰다가 다 사라질 거 같아서..”
몇천의 시드머니는 귀하다. 뭔가 잘만 이용하면 조그마한 투자라도 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투자라고는 담쌓고 지냈는데 대체 무슨 투자를 한단 말인가. 당장에 드는 생각은 부동산, 주식, 코인 정도. 사실 주식은 조금 손을 댔었다. 결국 나중에 주식 손해 본 것 때문에 아내와 대판 싸우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오빠! 주식은 안 되는 거 알지?”
“응? 응.. 알지.”
“뭐야? 설마 주식 생각한 거야? 내 눈 똑바로 봐.”
‘뭐야 이 강한 기운은.’
호랑이 같이 느껴지는 아내의 눈빛을 보고 나니 주식에 손대는 순간 큰일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전적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때도 부자 될 것처럼 막 떠들더니. 결국 돈도 삼분의 일 수준 정도 건졌나? 맞지?”
정확하게는 -85%의 수익률이었다. 갑자기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자 가슴이 아파진다. 잘해보려고 투자했던 건데 쉽게 돈 벌 방법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었다. 당시 회사에서 팀장이 고급정보라며 무게 잡고 얘기했었다. 본인도 장모님 돈까지 빌려서 몇억을 넣었다고 했었던가. 그 말 때문에 큰 신뢰를 느끼고 뭔가에 홀린 듯 주식에 손을 댔다. 그전까지 주식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하다.
한동안은 수익률이 좋았다. 정확히 3천만 원을 집어넣었는데 6개월 정도 지나자 5천만 원 가까이 됐었으니까. 그때는 날아갈 듯 기뻤다. 돈이 부족해서 조금밖에 못 넣은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 뒤로 주식을 처분했어야 했는데.. 욕심이 문제긴 문제다. 당시엔 날마다 퇴근 후 술을 마시러 다녔다. 기분이 좋아 술값도 자주 계산했었는데. 같이 따라온 동료에게도 왜 주식 투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와..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자랑 엄청해댔었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하다. 그러다 어디서 용기가 났었는지 아내 몰래 신용대출로 2000만 원을 받아서 추가로 주식을 구매했다. 당시에는 당연히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주식은 계속 오르고 지금 빌린 돈은 벌은 수익으로 충당하면 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초심자의 행운을 만끽하며 승승장구하던 주식.
그러다 맞이했던 토요일 아침. 팀장의 다급한 메시지가 단톡방에 올라왔다.
[미치겠네..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실체가 없었대. 그냥 가능성만 가지고 투자유치를 받던 건데 알맹이가 없었나 봐. 기사가 떴는데 망했어. 큰일이네.. 아무래도 월요일에 장이 열리면 거래정지 먹을 거 같은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제발 다시는 투자 안 할 테니 한 번만 봐주세요. 제 돈 찾을 수 있게만 해주세요.’
주말 내내 기도만 했다. 하지만 해당 기업과 관련한 안 좋은 기사가 계속 쏟아져 올라왔다. 이대로면 희망이 없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설마 거래정지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까?’라며 희망을 가져도 봤다.
그렇게 맞이한 월요일. 한치의 어긋남 없이 거래정지가 되어 버렸다. 팀장의 말을 믿고 투자했던 나와 몇몇 동료는 멘털이 이미 나간 상태였다. 그나마 내가 제일 적게 투자한 상황이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그렇게 언제 풀릴지 모를 거래정지를 맞이했고 생각보다 해제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대출받은 금액이었다. 2000만 원 밖에 안 되는 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내게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집을 무리하게 사며 발생하는 이자에 신용대출까지 값아야 하는 상황. 게다가 운까지 없어서 대출금리가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아내에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아내와 술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엿보다 말을 꺼냈다. 처음 내 얘기를 들은 아내는 믿지 못했다.
“거짓말이지?”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거짓말이 아님을 알아챘다.
“미쳤어? 나랑 상의도 없이 대출을 끌어다 썼다고? 오빠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아내는 화를 삭이기 힘든지 한참 동안 날 노려보고는 씩씩거렸다. 그러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더니 엄포를 놓았다.
“이혼하자.”
“어? 무슨 소리야 지은아?”
“잘못들은 거 아니야. 나 이렇게는 못살아. 오빠는 날 가족으로 생각도 하지 않잖아. 내가 그런 사람을 뭘 믿고 앞으로 살아가?”
“아냐 아냐.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도 잘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 결국 오빠도 핑계 대는 거잖아. 차라리 잘됐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돼서 다행이야. 차라리 지금 갈라서는 게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행복일 수 있어.”
아내를 뜯어말리기가 정말 힘들었다. 무릎도 꿇고 싹싹 빌고 울기도 하고 소리도 쳤다. 그렇게 며칠 동안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겨우 이혼은 없던 얘기가 되었다. 대신 아내의 조건이 있었다.
“각서 써!”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철저하게 재산을 비롯해 양육과 관련한 모든 부분을 각서에 언급했다. 너무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아내의 마음을 돌렸다는 게 중요하니까. 각서를 다 쓰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감까지 찍었다.
“이제 됐어?”
“말투가 이상하네? 내가 오빠를 이해하는 거지. 오빠가 날 이해할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맞아 네 말이.”
“절대 빚 다 갚을 때까지 회사 그만둘 생각 하지도 마!”
그랬던 우리. 결국엔 둘 다 회사를 관두고 이렇게 마주하고 앉아 있다.
“아무튼 주식은 안돼. 알지?”
“응. 당연하지. 그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그렇다면 약간의 시드머니로 할 수 있는 투자는 부동산 밖에 없는데. 코인은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혹시 스캇한테 좋은 투자처가 있는지 좀 물어볼까?”
“오빠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왜 그래 또!”
“난 그렇게 생각해. 예전에 주식도 집 산 것도 결국 잘 안 풀린 게 남의 말만 들어서 그런 거 같아. 우리 생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결국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 하니까 뒤늦게 하고. 그러다 손해 보고. 만약에 오빠가 스캇한테 정보를 들었다고 쳐. 근데 그렇게 했는데 만약 손해 보면 어떡할 거야? 그땐 스캇하고 갈라서게? 절대 물어보지 마. 알았어? 나도 고민이야. 우리 집 상황이 안 좋으니까 어떻게든 돈을 불려야겠지. 근데 봐봐. 현실은 대출도 많고 아직 우리 형편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언제 이렇게 성숙해진 거지? 아내의 말이 하나하나 와닿았다.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데 항상 핑곗거리를 찾기 바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한 거니 내 탓이 아니야라는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어리석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질책하며 아내와 얘기를 더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