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스의 승리

112 걸음

by 고성프리맨

끝까지 몰아세우며, 타인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늘 내가 죽든 당신이 죽든, 끝까지 가는 거야.'


한때는 친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정적이 되어 있었다. 밥그릇(이라 칭하고 일이라 부른다.) 싸움 앞에선 결국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야‼️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있는데. 이번 한 번만 내 말대로 해줘. 그게 안 되냐?"

"안 되겠는데요. 맨날 그런 식으로 일감 떠넘기잖아요. 그러려고 잘해준 거예요?"

"뭐? 너 말이 심하다? 내가 상사니까 까라면 까‼️ 나이도 나보다 어리면서."

"엄밀히 따지면 몇 달 차이도 안나잖아요. 그리고 지금부터 저희 대화 전부 녹음합니다?"


상대는 녹음하겠다는 나의 태도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그 앞에다 보란 듯이 난 휴대전화의 녹음버튼을 누르며 갖다 댔다.


"치우라고 말했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휴대폰을 보며 우리는 자리에 굳어버렸다.


"후.. 뭐 하는 짓이죠? 휴대폰 값 물어내요. 정가대로 받아낼 테니 그리아십쇼."

"야! 미안한데.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너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로에 대한 야유와 조롱, 비난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친했던 우리는 단 한순간으로 인해 멀어져 버렸다.


그토록 길길이 날뛰면서까지 하기 싫었던 업무는 결국 안 하게 됐다. 긴급한 본사의 호출이 있었고, 며칠 뒤 내 소속이 변경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 둘 다 잘한 건 없어 보이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통제되는 게 아니듯, 당시의 난 누적되어 있던 불만을 표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침맞게 상황이 생겼고, 나의 모든 불만을 담아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펑‼️ 뇌관이 터졌다.


상황을 수습하려면 터지기 전에 했어야 하는데, 터지고 난 뒤엔 처참하게 흩뿌려진 채 서로의 상처만 남아있었다.


불만을 터트리고 나면 속이라도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거워졌다.


"잘했어! 이미 들이받은 걸 어떡하냐. 앞으로 잘해라."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경솔해서 그만."


이사님의 면담 뒤엔 또 다른 부서장들의 연이은 면담이 뒤따랐다.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의 과정이 존재했으리라. 사측은 우리 중 누구라도 이탈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둘 다 붙잡기 위한 노력을 했다.


분란을 일으킨 대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직원, 하극상의 표본]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 뒤로 파견이 아닌 본사 근무로 전환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녔던 회사를 퇴사한 지도 몇 년이 흘렀을 즈음, 친했던 전 회사 동료의 부친상이 있어 조문을 가게 됐다. 속에서 고민되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라도 조문을 갔다가 예의 그 상사와 마주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인생에서 때로는 소설 속 기연보다도 더한 우연이 생기곤 하는데, 하필이면 떡하니 마주쳐버렸다.


'흐으으읍.'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최대한 내색은 하지 않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상대도 나를 보곤 흠칫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말없이 목례를 건네왔다.


잠시 후,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바로 옆자리.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불편했다.


밥을 먹는 내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씹다가 삼키고 잘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에 어색하게 동조하며 웃어주는 게 전부. 씹고 넘기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배가 불러지기 시작해 젓가락을 내려놨다. 인사를 하러 상주가 찾아왔다.


"어.. 두 분? 어떻게 같은 자리에 앉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도 그랬으려나? 지나간 일이 갑자기 되살아나며 부끄러움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상주는 다른 이에게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살았다.'


밥도 다 먹었고, 할 이야기도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들 잘 지내세요."


천천히 일어난다 생각했건만 내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 어딜 그리 황급히 가려고? 아.. 그래요. 나중에 연 되면 봐요. 잘 살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옆자리의 옛 상사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 한마디 밖에 나누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뒤로한 시선의 교차. 슬퍼 보이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으며, 아쉬웠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오자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쉴 수 있었다.




"야 죽을래?"

"네? 왜 그러시죠 가장 님??"

"저렇게 쓰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왜 여자였다고 말 안 하냐? 응? 뭐 찔리나 보지?"

"에이 무슨 소리십니까. 상사와 부하의 관계였을 뿐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위에 쓴 친했다?? 가 좀 걸리네? 자세히 말해볼래?"

"지금 그런 얘기 쓰려던 게 아닌 거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남은 생을 걸고 맹세컨대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친했었다. 그냥 누나가 동생을 챙겨주듯한 느낌. 약간의 애정결핍이 존재하던 성향상 그런 챙김 받음이 좋게 느껴졌었고, 그래서 맡겨진 일을 더 잘해야겠다 생각하긴 했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눈빛은 그런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라는 이름하에 발휘되는 놀라운 능력. 하지만 빗나갔다. 정말이야 이 사람아.


제목에 피로스의 승리라는 걸 붙여 놨을 때, 해당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에피소드를 읽고 나와 상사 간의 관계를 빗대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흔히 상처뿐인 승리로 일컬어지는 피로스의 승리는 괜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우쭐거리려다 아내에게 된통 당하며 수습하기 바쁜, 현재의 상황을 의미한다.


과거는 과거였다며 내려치기로 수습해 보지만, 한 번 마음이 상한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안 꺼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이야기를 꺼내 부관참시하며 스스로를 늪으로 빠뜨리는 행위를 하다니. 유부남으로서의 업력이 부족하도다.


부디 내 글을 읽는 유부남이 있다면, 과거의 경험으로 아내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 따위는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낼 생각도 하지 말길.


"왜요?"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요'라도 붙일걸.. 괜히 강한 척은..)"


너무 많은 말은 확실히 화를 부른다. 말을 아끼고 조신하게 행동을 하도록 하자.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폐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네아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네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네아스는 말했다.

"폐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

―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 p. 158~159


- 피로스의 승리

: 이겼으나 손해뿐인 승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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