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순간부터 헌 책이 되어버린다.

114 걸음

by 고성프리맨

고등학교 시절 살고 있던 동네엔 헌책방 골목이 있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하교 후 특별히 놀거리가 없으면 친구와 함께 헌책방을 들르곤 했었다. 여느 서점과 비슷하게 그곳엔 문제집이 있었고, 다양한 잡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퀴퀴한 냄새와 함께 묶여 있는 책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거나 이미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채 꽂혀 있는 한문과 한글이 뒤섞인 책이 많았다는 거다. 가끔은 잃어버린 교과서의 중고본을 사러 가기도 했고. 여하튼 책을 엄청 좋아했던 건 아니었는데도 큰 유흥거리가 없어서였는지 꽤나 자주 들렀었다. 확실히 도서관과는 다른 느낌을 전해주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새로 나온 책을 먼저 찾아보기 시작했다. 딱히 무슨 책을 사야겠다고 콕 집은 채 방문하지 않는 이상 헌책부터 손이 갈 일은 잘 없었다. 한참 동안 새 책 사이사이를 오고 가다 피로가 몰려올 때쯤, 비로소 헌책이 진열되어 있는 혹은 쌓여 있는 곳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아! 맞아. 저번에 그 책 재밌었는데.'


문득 50쪽 정도 읽다 말았던 책 생각이 났다. 이젠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파격적인 제목에 이끌려 펼쳤던 책으로 기억한다.


슬쩍 저자 소개를 한번 본 후, 목차를 살펴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소제목을 몇 개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정독할 생각이 없었기에 끌리는 부분부터 펼쳐서 읽었다.


단숨에 한 꼭지를 읽어 버렸다. 생각보다 재밌네?


그런데 이미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웠지만 책이야 집에도 있는 거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자며 서점을 나왔었다.


'잊고 있었네. 그때 그 책이 어디 있었더라. 이쯤 있었던 거 같은데.'


며칠 전 기억을 더듬어가며 열심히 읽던 책을 뒤져봤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 어? 팔린 건가?'


아무래도 팔린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있어야 될 곳에 읽던 책이 없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미치도록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 읽었어야 했어.'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결코 다 읽을 수 있을 분량은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책과의 연은 거기까지였던 걸로. 중고서적이란 게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책에도 그에 걸맞은 주인이 있나 봐.'


내겐 비록 50쪽까지만 허락됐지만, 누군가의 품에서는 부디 완독 되길 바랐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중고서점을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책은 인터넷에서 사면 언제든 편하고 쉽게 받아볼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누군가의 큐레이션에 의해 혹은 판매지수에 따라 정렬된 순위를 살펴보고는 그중에서 끌리는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하면 받아볼 수 있다.


지금도 오프라인 서점이 있으니 직접 가서 이 책 저책 펼쳐보고 읽어보다 마음에 드는 걸 사도 되겠지만, 언젠가부터 서점까지 가는 행위도 귀찮게 느껴졌다. 게다가 종이로 된 책이 아닌, 전자책의 형태도 많기에 굳이 서점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발품을 팔 때가 생긴다. 정확하게 말하면 손품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떤 이유에서건 읽기 시작한 책을 통해 알게 되는 책이 생길 때가 있다. 저자가 영향을 받았던 책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딘가에 특정한 내용을 기고했던 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내가 모르는 그 책에 대한 설명을 맛있게 해 놓을수록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일단 소유하고 싶어.'


키보드를 활용해 책 제목을 입력 후 검색을 누른다. 책의 정보가 나타났다.


'자 이제 장바구니에 담고, 어??? 장바구니 버튼이 왜 안 보이지?'


내 눈앞에 떡하니 쓰여 있는 [절판]이라는 문구와 마주했다.


한정판을 소유하고 싶은 예의 그 느낌처럼, 막상 가질 수 없다 생각하니 더 큰 소유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판되어 팔지 않는 책을 무슨 수로 산단 말인가. 물론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면 빌려서 보면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란 사람은 소유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고집을 부렸다.


결국 중고장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서점 사이트의 중고 코너에 올라온 책이라도 있으면 그걸 사면되겠지만 없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어떨 때는 말도 안 되게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있을 때도 있다.


가령 정가가 5,000원이었는데 현재는 80,000원 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수요와 공급 측면에 따라 당연히 고서의 가치가 올라갈 수 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고서라고 칭하기에도 애매한 느낌의 서적이다 보니 차마 저 금액까지 지불하면서 사지는 못하겠더라. 어쩌면 그 정도까지 원하는 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다. 나쁘지 않은 가격에 하나 남은 책을 구매할 수 있었다. 책 상세 페이지에서 구매 버튼만 클릭하고 결제하면 이제 내 소유가 되는 것이다.


중고서점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책의 상태에 따라 등급이 표시돼 있고 가끔은 판매자의 부탁 같은 메시지가 쓰여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책상태 [상]. 괜찮네. 자 이제 구매를 해볼까?' 하는 찰나, 판매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주문내역에 당시 판매자가 올린 글을 볼 수 있게 해놓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아쉽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책을 받아 볼 다음 사람을 위해 소중히 아껴서 읽었습니다. 부디 함부로 대하지 마시고 원하던 내용을 얻게 된 후 그다음 사람을 위해 같은 마음으로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판매자의 말처럼 도착한 책의 상태는 중고서적 답지 않게 너무 깨끗했다. 책의 폰트와 디자인이 예스러운 걸 제한다면 새책을 샀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의 말을 곱씹어 봤다. 보통 내가 책을 사는 이유는 소유하기 위함이 컸는데, 그는 다음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마음이었기에 이번 책은 그의 부탁대로 소중히 아껴가며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중고서적의 진가는 알아봐 주는 이가 있을 때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찾는 이가 없다면 어딘가의 공간을 차지한 채 묵묵히 세월을 견뎌야 하는 불쌍한 운명을 타고났다.


책이라는 건 사는 순간부터 심하게 감가가 적용되는 상품이다. 가격적인 투자의 가치로만 놓고 본다면, 결코 추천해서는 안 되는 투자 상품이다.


"아니 대체 누가 책을 투자 상품으로 생각해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책이라는 건 투자 가치가 흘러넘치는 상품이다. 감가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도 아니고, 단순히 마음과 머리에 쌓일 지혜와 지식 때문도 아니다. 원래 수집이라는 게 꼭 금전적인 가치만 생각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고 애정하는 행동. 의미 부여하기. 잠시나마 책을 사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노력하는 시간. 읽었을 때 느끼는 감동. 누군가를 생각해 보는 마음. 알 수 없던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단순히 책을 하나 구매했을 뿐인데도 내가 얻어낸 것은 넘치게 많았다. 만약 같은 돈을 지불해서 이 정도의 만족감을 얻어낼 수 있는 상품이 있다면 당연히 시도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대체할 만한 상품은 찾지 못했다. 적어도 내겐 가격대비 큰 폭의 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충분한 투자 상품이다. 덤으로 내가 만나볼 수 없을 낯선 저자와의 교류도 해볼 수 있고.(비록 단방향이지만)


그래도 이젠 단순한 소유욕은 좀 줄여볼까 한다. 내게 자신의 소중한 책을 팔았던 판매자처럼 적당히 품에 안았다가 때가 되면 놓아줄 수 있는 마음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소유만을 위해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길 바라본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news1.kr/society/general-society/318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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