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걸음
흰 바탕의 화면에 어떤 걸 쓰면 좋을까?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힘겹게 한 줄을 쥐어 짜냈다. 이대로 흐름이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어째서 날마다 짜내야만 겨우 써지는 걸까? 쉽게 쓰는 사람도 많던데.'
오늘도 푸념 아닌 푸념으로 서두를 시작해 본다. 이제 정기적으로 푸념을 털어놓는 건 익숙한 행동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거 같다.
최근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 메모로 남겨 놓았다가 쓰는 일이 많았는데, 그마저도 과거에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예전에는 기억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더 이상 부심을 부릴 수도 없게 돼버렸다.
내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상의 크기가 좁아서인지, 쓰는 글도 한계성이 느껴지는 거 같고 자꾸만 마음이 움츠러든다. 기껏 해내자라고 다짐했던 순간이 얼마 전이었는데, 벌써 또 슬럼프가 찾아오려 하다니. 이런 나약한 사람 같으니라고.
나약함. 음.. 그러고 보니까 어릴 때부터 어리바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던 거 같고, 의지박약과 나약하기로는 선두를 다퉜던 기억이 나는구나.
40대가 되도록 여전히 멘털이 들쑥날쑥하고 수도 없는 다짐의 반복을 하면서도 매번 무너지는 거 보면, 전형적인 나약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뭐.. 내가 꼭 강인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나?
어디 나약하게 40여 년을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 한번 써볼까?!
왠지 이상한 말을 끄적일지도 모르니 혹시 나락의 느낌을 감지한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멀리 도망가는 게 어떨는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도 읽어주시면 감사할게요‼️)
남들이 다 해내는 걸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는데, 부끄럽지만 하나 공개해 보자면 [신발끈 묶기]에 관한 것이다.
- 에?? 신발끈 못 묶어요?
여러 번 배우긴 했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시도해 보면 하찮게 묶어진다. 유일하게 묶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고는 있는데 그 방법으로 묶고 나면 30초도 되지 않아 묶기 전 상태로 돌아가 버리곤 한다. 그런 모습 때문에 주변에서는 늘 갑갑해했고 대신 나서서 누군가가 묶어줬었다.
신발끈 묶기로 인해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훈련병 생활을 할 때 벌어졌다. 비록 4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군대에서 지급되는 물품이 있는데 그중 군화가 최대 난관이었다.
특히 훈련병들은 다들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 상태라, 타인까지 챙기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동기들은 하필이면 나라는 큰 짐을 만나 버렸다.
군화하나 제대로 묶지 못해 늘 낑낑거리다 늦게 나가기 일쑤였기에, 주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날 챙기기 시작했다. 까딱하면 단체기합을 면치 못할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아오.. 신발끈도 못 묶고 뭐 하는 거야?"
"헤헤.. 미안. 고마워."
입으로 연신 투덜거리며 내 군화끈을 묶어주는 동기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덕분에 훈련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군화끈 문제로 기합을 받지는 않을 수 있었다. 솔직히 하나 더 고백하자면 마지막 2주 정도는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게 되었었다.
- 아니 고문관이네???
당신의 그런 말 한마디가 내게 고문처럼 다가온다는 걸 명심하시길.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고문관스러운 건 사실이니 딱히 반박은 못하겠다.
대학교 때 자전거 MT를 가게 됐다. 불행하게도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두 발 자전거라는 걸 타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늘 집에서만 생활했고 굳이 나가서 야외 활동을 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 말로만 듣던 히키코모리?
은둔하며 살진 않았으니 함부로 그런 칭호를 달 수는 없을 거 같다. 단지 아웃도어 활동이 싫었을 뿐이다.
"이번에 자전거 MT 갈까 하는데 어때요?! 자전거 못 타는 사람 없죠?!"
모두의 환호성 속에 성대히 치러질 MT 계획을 망치고 싶진 않았지만,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엇? 자.. 잠깐만. 거짓말이지? 진짜로 자전거 못 탄다고??"
"응.."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차갑게 식더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뭐야. 자전거도 못타?"
"생긴 값하네. (내가 뭘?!)"
한참의 고민 끝에 누군가의 제안으로 다시 분위기가 밝아졌다.
"커플 자전거 한대를 빌리면 해결이잖앙? 완전 럭키비키네.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거 금지 X) 그런데 누가 쟤랑 커플 자전거 탈래?"
...
정적은 길어졌다. 아무도 나랑 커플 자전거 타기 싫은 거구나.
"내가 해볼까? 으하핫."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는 쪽엔, 한 살 많은 형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형과 나는 커플이 되었다. 요즘 같이 소수자가 인정받는 시대가 되기 이전부터 앞서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선보이다니.. (아니야!)
아니다. 그냥 친한 형과 동생 사이였을 뿐이다. 여하튼 다른 이들은 전부 각자의 자전거를 탔고 형과 나만 커플 자전거를 타게 되었는데, 잘 타는 사람이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 타보는 자전거. 그것도 커플. 그저 낭만이었다. 물론 형은 아니었겠지만.
한참 동안 평지 구간을 달렸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는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르막 구간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렸다.
"야! 뒤에서 페달 안 밟아?"
"저 계속 밟고 있습니다만? 허벅지가 터질 거 같습니다만?"
"하아 아닌 거 같은데. 진짜야?? 이상하게 나만 혼자 페달 밟는 기분인데?"
"그럴 리 없습니다. 나약한 본인 체력 탓을 하세요."
하지만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의 연륜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중간중간 다리가 아파 페달을 거의 밟지 않은 구간이 있었다는 건 나만이 아는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걸까. 굳이 공유하지 않아도 연륜으로 깨닫게 되는 능력이 있나 보구나.
...
죄 없는 자만이 내게 돌을 던질지어다‼️
생각해 보니 민폐 덩어리였구나. 몇 가지 사례가 더 있긴 한데 쓰면 쓸수록 내 얼굴에 침 뱉는 느낌이라 저절로 자중하게 되네.
하필이면 예시로 든 것들도 어째.. 나약하게 사는 나쁜 예를 보여준 것만 같아 마음이 많이 불편해졌다.
- 보는 우리는 더 불편합니다만?
이제야 알았다. 그때는 내가 참 미성숙했구나. 미상불 나를 도왔던 모든 이들은 어찌도 그리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졌던 걸까.
'역시 난 인복이 있구나.'
-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방향으로 결론이 지어질 수 있는 건지?
40여 년 정도 나약하게 살았으면 충분히 나약할 만큼 나약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남은 여생은 조금 덜 나약할 수 있기를..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관계로 글은 여기까지 써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