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걸음
며칠 째 비가 내리는 중이다. 가만히 실내에 앉아 비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해도 특별히 나쁠 것은 없다.
"아니. 난 별론데? 오빠야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좋지. 밖에서 일한다고 생각해 봐. 기분이 좋겠어? 안 좋겠어? 어엉?"
아침부터 시작된 아내의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가령 "그러게 비 구경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라거나
"맞아. 밖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 못했네. 나도 참 ..ㅎ?" 라는 식으로 오답을 말한다면 큰일.
"비 오는 주말인데도 알바 가야 해서 너무 힘들겠다. 대신 가주고 싶은데 그렇게 못해줘서 미안해. 내 맘 알지? 오늘도 고생스럽겠지만 힘내고 그만둘 때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아차‼️ 그리고 내가 데려다줄게."
"그래야지! 당연히 내가 출근을 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말이라고 해서 표현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경을 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견지망월] 하지 않을 수 있었네. 휴.. 다행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
[견지망월]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달을 잊어버리고 손가락을 본다.
모셨던 상사 중에는 마치 본인을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급으로 생각하는지 은유와 비유법으로 업무를 지시했던 분이 있었다.
"오늘은 날이 춥네. 추운 날엔 역시 국물이랄까. 그런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이것 참.."
정확히 나를 향해 상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막내로서 눈치 스킬을 발동할 때가 되었군.'
시간을 보니 11시 30분. 이제 곧 점심시간이 되겠구나.
1. 오늘 상사는 국물 요리를 먹고 싶어 한다. 그러니 국물 요리를 추천해 보자.
2. 업무 일정이 빠듯하니 포장을 해와서 먹자고 하자.
'역시 난 눈치왕‼️'
"헤헤 벌써 점심시간이 돼가네요? 맞아요 저도 (사실 매일 먹어서 지겨운 국물요리지만) 국물요리가 마침 생각나던데요?"
"자네는 아직 점심시간도 멀었는데 벌써 생각이 딴 데 가있나?"
"(당황했지만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그.. 그럴 리가요. 해야 될 일도 많고 바쁜데, 나가서 사 먹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어떻게 포장이라도 해올까요?"
"어째서 인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일까.. 먹는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진정으로 일을 즐길 수 있을 텐데 허어. 나 혼자만 괜히 깊게 생각했구나.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합시다 다들."
'뭐.. 뭐라는 거야? 그래서 밥을 먹겠다고 말겠다고?'
내 관심사는 오로지 점심식사에 꽂혀 있었다. 그때 동료 D의 채팅이 모니터에 뜨는 걸 봤다. 상사의 반응에 머쓱해졌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업무로 복귀하는 척하며 채팅을 살펴봤다.
- 그냥 가만히 있어요. 아침에 들어보니 요즘 만나는 여자랑 잘 안 되는 거 같더라고요.
- 그거랑 날이 추워서 국물 생각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 전에 본인이 했던 말 기억 안 나요? 잘 생각해 봐요.
- 뭐.. 어? 설마.. 지나가듯이 말했던 그거요?
- Good job.
'말도 안 돼. 그냥 커피 마시면서 듣기 좋으라고 지나가듯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며칠 전에 상사가 티타임에서 혼자 떠들던 게 생각났다. 크게 관심도 없는 본인의 연애사와 이성관에 관한 장광설을 말하던 그날, 주제도 모르고 내가 이상한 말을 했었다. 하필이면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꺼냈기에, 나도 모르게 위로랍시고 했던 말.
"에휴. 대표님 정도면 아쉬울 게 없죠. 제 주변에 아직 결혼 안 한 분도 여럿 있는데 혹시 잘 안되면 말하세요. 언제든 소개해드릴게요."
이상할 정도로 눈빛이 반짝거렸었다. 그냥 원래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됐었는데. 하필이면 마음에도 없던 내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니.
"그래.. 마음이 허하네 허허. 국물 요리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겐 일 밖에 없는 듯허이. 껄껄."
만약 D의 채팅이 없었다면 '다시 또 미치기 시작했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텐데 전후를 알고 나니 심란하긴 해도 불안해지진 않았다.
'어떻게 핑계를 댄다..'
일하라는 말과 달리 계속 쓸데없이 말 거는 상사를 보며 머릿속 CPU가 빠른 연산을 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답을 찾아내야 해. 믿고 있겠다 나의 뇌여.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는 법. 늘 먹는 국물이라도 매일 그 맛의 오묘한 조화가 다르다는 걸 아시는가? 그래서 나는 매일 국물요리를 찾는 게야. 허허. 하지만 오늘은 입맛이 없을 예정이구나. 휴.. 일은 또 어째서 날마다 바쁜 것인가. 바쁨과 나를 떼어놓고서는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렸다."
누구보고 하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저런 화법이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 콕 집어서 "너한테 하는 얘기라고!"하지 않는 이상 얼굴엔 미소를 띠고 머리는 차갑게 결론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도달했다. 나의 결론‼️'
"오늘 아침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요즘은 비혼주의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미래엔 혼자 사는 가정도 늘어난다고 하고 그에 맞춘 아이템도 많아질 거라고 하니. 옳다고 정답처럼 믿었던 것들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가 봅니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도는 것을 느꼈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직접 그에게서 본심을 이끌어내야 비로소 성공일 것이니.
翩翩黃鳥 펄펄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유리왕 [황조가]
'본디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법. 비록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해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만.. 크게 쓰일 상사께서 어찌 범부인 저와 같은 삶을 사시려 하십니까.'
머릿속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상사는 잠시 후 나의 말에 응수했다.
"국물이 내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인가. 사람의 온기가 따뜻하게 만드는 것인가. 함께 있어도 춥게 느껴지는 내게 어째서 오늘은 국물의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인가. 차가운 일의 감촉만이 내 몸을 두르고 있구나."
'이 인간이..'
"나의 친애하는 동료 D여. 어쩌면 대표님과 나이가 비슷한 그대라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숙한 저로선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단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물줄기를 잠시 동안 두 줄기로 가르는 정도에서 끝이겠지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동료 D에게 뜬금없이 지금 상황을 전부 전가시키려는 시도. D는 내게 눈으로 욕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쓸데없고 쓸모없는 대화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K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니 업무 얘기도 아니었구나.
"그냥 업무 안 하고 노닥 거린 걸 무슨 견지망월이라며 문자까지 써가며 설명합니까??"
그랬다. 그래서 그 회사는 결국 망했다. 상사도 잘못하고 나도 잘못하고 시대도 잘못했다. 하필이면 상사와 만나주던 분은 어째서 계속해서 만나주지 않았던 것인가. 어쩌면 망해버릴 회사의 미래를 예측했기에 도망간 것인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과 상관없이 달은 떠 있다. 핵심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시간을 쓸데없이 보내지 않는 것. 그것은 중요하다.
만약 과거의 내가 상사에게 한낱 놓친 여자에 대한 미련 대신, 업무에 대한 도모를 하자고 좀 더 설득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진 않았을까?
지이이잉-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갈 때쯤 걸려온 아내의 전화.
"오빠.. 그냥 쓸 거 없으면 잠이나 자. 그런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올 예정이라던데."
"그래? 음 날씨가 왜 이러나 몰라. 이따 조심해서 와."
"죽을래?"
"어..??"
아차.. 견지망월.
"농담이었지. 당연히 퇴근 시간 맞춰 데리러 가려고 했어. 뭔 농담도 못해."
"그렇지? 진심인 줄 알뻔했네 ^^ 그럼 이따 봐."
알겠나? 달은 항상 떠 있는 법이니 부디 손가락이 잘못되고 싶지 않다면 손가락이 아닌 달을 쳐다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슬슬 씻고 데리러 갈 준비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