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걸음
벌써 십 년 정도 매주마다 꼭 지키고 있는 루틴.
이걸 공개하려니 왠지 아쉽네. 천기누설하는 역학자의 마음이 이러려나? 공개하려니 속이 쓰리다. 이건 고급 정보인데 말이지.
"뭔데 그래요? 조짐이 좋진 않은데."
힌트는 이미 드렸다. 키워드는 [매주].
일주일의 시작을 보통 이 루틴과 함께해 왔다. 고독한 숫자와의 싸움.. 토요일이 되면 온갖 상상이 비빔밥처럼 비벼지며 쓸데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는 꿈 그러나 누군가에겐 현실이 되기도 하는 그 무엇.
바로 [로또]다.
...
결혼 전부터 아내에게 호언장담을 했었다.
"이것만 되면 말이야. 흐흐. 다 계획돼 있다고."
그럴 때면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이 보이곤 했었는데, "말로만 듣던 진실의 미간이구나‼️"라는 나만의 착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맛도리 음식을 먹고 찌푸리는 미간과는 엄연히 결이 다른 것이었음은 뒤늦게 알았다.
결혼 후 10년이 지났다. 여전히 난 아내에게 호언장담을 할 때가 있다.
"이것만 되면 말이야 흐흐.."
"저것만 되면 말이지 흐흐.."
"요것만 된다면 어떨까? 흐흐.."
"이렇게도 될 수 있다니까? 흐흐.."
적당히를 모른 자는 결국 철퇴를 맞는 법.
"그만해‼️ 내가 언제 요행 바란 적 있어?!"
뜻밖에 얻는 행운이라는 의미인 [요행]. 그렇구나 내가 바라는 건 우연한 행운이었구나. 매 순간 취해있듯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지만 가끔은 제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다. 아내에게 호되게 말을 듣는 순간 꿈에서 깨, 문득 현실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언제부터 요행을 바라게 됐을까?'
어떤 요행을 바라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내 머릿속엔 $ 생각으로 순식간에 꽉 차버렸다. 내가 바라는 요행의 종류는 바로 [돈]이로구나!
'돈을 우연히 얻을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을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건 아니겠고,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몰래 들고 온다면? 내 앞에 철창살을 마주하게 될 테지.
'그래 [운]에 기대자‼️'
어릴 때부터 일확천금과 부귀영화를 한 순간에 얻을 수 있음을 광고해 온 로또. 로또만이 살길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정리된 순간부터 쭈욱 아무 의심 없이 매주 2,000원의 돈을 갖다 바치고 있는 중이다.
자동하나, 수동하나, 단 돈 이천 원의 행복 크으.. 사는 순간부터 이미 계획은 전부 세워져 있다.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선 당첨만 되면 되는데 말이지. 재정난에 허덕이는 건설사가 짓던 도중 중단된 폐아파트 마냥, 당첨이 되지 않는 한 내 인생계획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마는 것이다.
"로또 사느라 돈 쓸 시간에 차라리 그 돈으로 먹을 거라도 사 먹어!"
아내는 로또 하는 내 모습을 극도록 혐오한다. 아내 인생에 요행이란 마치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운에 기대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것이겠지.
'어디 당첨되기만 해 봐라. 내가 알려주나 흥..'
"혹시 당첨되면 숨길 거야?"
뜨끔했다. 내 생각 정도는 가볍게 읽어낼 수 있는 아내 앞에서 섣부른 생각을 한 실수였다.
"그럴 리가 있어? 이게 다 우리 가족 잘 먹고 잘살자고 열심히 하는 거라고."
"로또 사는 걸 그렇게 포장하지 마라?"
그래도 센스가 좋았다. 자연스럽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 그러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지금까지 로또 사느라 얼마나 썼을까?'
정확히 계산하긴 힘들겠지만 추정치 정도는 알고 싶어졌다. 정말 그 돈을 아꼈다면 아내 말대로 맛있는 거 사 먹을 수 있었을까가 궁금하기도 했고. 자 계산 드가자.
1년 = 52주
52주 X 2,000원 = 104,000원 (호오.. 1년에 10만 원 정도 쓰고 있었구나.)
104,000원 X 10년 = 1,040,000원
10년 간 대략 백만 원 정도 썼구나.
'생각보다 엄청 많이 쓰진 않았네?'
게다가 미미하지만 가끔 5,6등에 당첨된 적도 있으니. (기껏해야 5번이 안 되는 횟수였다.)
아내의 말대로 백만 원 정도면 맛있는 건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을만한데, 그렇다고 이게 못 쓸 정도의 돈인가? 이 사실을 고해야 한다. 아내도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결코 내가 쓸데없이 과소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 말 좀 들어봐."
"바빠."
"잠깐이면 되는데?"
"니가 일 안 해서 내가 다 하는데 바쁜 거 안 보여?? 그만해라?"
"네."
아.. 맞다. 이런 식으로 글 쓰지 말라고 아내가 지적했는데. 수정이 필요할 거 같다.
"내 말 좀 들어보겠어?"
"바쁩니다."
"잠깐이면 될 거 같은데 많이 바쁩니까?"
"당신이 일을 안 하고 집에서 무위도식하시느라 현생의 바쁨을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적당히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고, 제가 당장 하고 있는 집안 일도 이렇게 산적해 있음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실 텐데, 지성인이라면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허허. 고맙습니다. 저의 모자람을 일깨워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아내의 니즈에 맞춰서 사람이 나빠 보이지 않게 잘 쓴 거 같네.
여하튼 로또와 함께한 지도 어느덧 십 년이 되었구나. 로또가 처음 생겼던 시기엔 딱히 일확천금에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어느 정도 현실의 벽을 느끼고 깨닫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스트레스를 발산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의 노력이 아닌 운에라도 기대서 현실을 바꾸고 싶은 꿈. 그리고 그 꿈을 단돈 1,000원에 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게다가 로또 가격은 여전히 장당 천 원에 머물러 있으니 가격적 인플레이션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늘도 무위도식 중인 40대 아저씨는 글에서 조차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로또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의 모든 40대가 나와 같은 생각과 삶을 산다면 분명 세상은 후퇴할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결코 나를 본받지 말고 현생에 최선을 다하며 살길 바란다.
"대체 본받을 점이 하나도 없는데 감히 뻔뻔하게 그딴 말을 하다니.."
그래도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낙첨된 로또 번호를 보며 잠시 한숨을 흘려보내고, 다시 또 한주의 부푼 꿈을 꾸기 위해 2,000원어치 로또를 구매해 본다.
'다시 또 일주일 간의 달콤한 꿈에 빠질 시간이 되었구나.'
그래도 걱정 마시라. 내 비록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결코 글쓰기만큼은 놓지 않을 예정이니.
"이딴 글 쓸 거면 놓아도 될 거 같습니다만? 이대로 하차하는 김에 작가님도 상하차나 뛰시죠?"
'작가..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로또만이 내 꿈이 아니었구나.'
그렇구나. 작가.. 또 다른 나의 꿈.
"왜 이래요 무섭게? 암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요. 그리고 알죠? 결코 상하차 하는 일을 비하해서 쓴 말이 아니라는 거?"
가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로또가 당첨되는 순간처럼 내 작품을 가지고 독자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로또가 당첨되려면 일단 사기라도 해야 하듯, 또 다른 꿈이 이뤄지기라도 하려면 결국 써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로또 사기를 멈추지 않고 매주하고 있듯이, 글쓰기 또한 지속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