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걸음
오랜만에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게 됐다. 늘 당연하게만 생각되던 출근길이었는데, 새삼 '사람 진짜 많구나.'
옆에 동승한 아내는 혀를 내둘렀다. 아내도 직장인이긴 했지만 서울행이 아니었던 관계로 출근지옥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한강변에 차 막힌 것좀 봐‼️"
"다들 그렇게 출근하지 뭐."
언제나 막혀서 정체를 이루던 차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여전히 정체하고 있었다. 물론 타고 있는 사람도 차종도 바뀌었을 테지만, 누군가가 비운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채우는 듯하다.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졸린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해 선채로 꾸벅꾸벅 조는 이.
자리에 앉아 화장을 가다듬는 여성.
휴대폰으로 웹툰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사람.
드물지만 자리에 앉아서 혹은 서서 책을 읽기도 하고.
낯선 얼굴들에게서 낯익음이 느껴졌다. 나는 비록 떠나서 추억이라 생각하는 그곳을 다른 이가 대신해 주고 있는 곳. 아침 출근길의 풍경은 익숙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이가 전부 나였다. 성별의 다름, 나이별 이칭을 떠나 모든 이에게 묻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난 이곳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단지 사는 곳과 환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언제나처럼 잡생각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려잇!"
아내의 일갈을 듣고 정신을 되찾았다.
"아.. 다 왔네? 자 약 사러 가자고!"
누군가에겐 참 이상한 일일지 모르겠는데 지방에 살다 보니 가끔씩 오게 되는 서울에서 우리 부부는 [약쇼핑]을 해간다.
불필요한 약까지 사는 건 아니고, 평소에 자주 사용 중인 상비약을 비롯해 몇 가지 약품을 쓸어(?) 담는다. 평균 10 - 30만 원 정도를 사용하는데 약쇼핑도 쇼핑이라고 살 때마다 플렉스 하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한 무더기의 약을 사고 나면 제법 출출해지는데 그럴 때면 맞은편에 위치한 [광장 시장]에 들른다. 안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가성비 좋게 빈대떡이나 육회비빔밥 등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이라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남아 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좋아하는 음식이라 오늘처럼 쇼핑 후엔 가벼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다.
오전 8시 50분. 밥 사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한데..
혹시 가게 문을 열었나 기웃거려 보는데 가려던 식당마다 전부 오픈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 일찌감치 열고 손님들까지 착석해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오빠 저기로 갈까? 근데.. 이 시간에 어째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조금 의아하긴 했는데 일단 대안이 없으니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매장은 꽉 차진 않았지만 세 테이블 정도 손님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아유.. 이걸 어쩌지.. 아직 셰프가 안와서잉~"
자리에 앉아 주문을 끝마쳤는데 뭔가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일하는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분명 다른 테이블의 손님 때문에 뭔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 같긴 한데. 잠시 후 일본어가 들렸다.
'아.. 일본 손님들이었구나?'
그랬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를 제외한 모든 손님이 일본인이었다. 그중에서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던 우리에게 아주머니는 SOS를 요청했던 거였다.
"아유.. 아유.. 칼국수는 늦게 나오는데.."
"번역기라도 돌려서 보여줄까요?"
"아니여 됐어. 내가 늦는다고 말은 했으니까."
한참을 일본 손님이 아닌 우리에게 상황을 설명하시더니 갑자기 이탈하셨다.
???
"음.. 번역기로 돌려서 보여드리는 게 어때?"
극단적 I성향인 난 당당하게 아내에게 그래줄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 외국인들이 있어서인지 평소처럼 정답게 날 노려보진 않았다. 게다가 옆 테이블의 손님들은 여자분들이니 괜히 내가 뭔가를 보여드리는 게 더 불편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아아~ 아리가토!"
아내가 번역해서 내용을 알려주자 일본 손님들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근데 오빠.."
"응?"
"이분들 칼국수 안 시켰는데?"
"???"
"진짜야. 칼국수 체크도 안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더 이상의 개입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후에도 일본 손님들이 계속해서 가게로 들어왔다.
"좀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더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영어 메뉴도 없고, 일본어로 쓰인 것도 없고.."
"뭐 다 사정이 있겠지."
"아무것도 안 해도 많이 와서 사주니까 그런 건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일본 손님에게서 미래의 내 모습을 본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낯선 어딘가에서 어쩌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반대가 되었을 땐 누군가의 작은 도움 하나를 애타게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모시는 수행기사를 맡게 됐다. 사위로서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데, 이제야 하게 됨이 무척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다행이다.
옆좌석에는 장인어른을 태웠다. 아무래도 아내의 고향인 이 동네의 지리를 잘 모르는 데다, 운전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 생각한 상태에서 장인어른이 옆에 계시자 헤매기 시작했다.
"여기서 2차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 이 길이 아닌데- 음.. 역주행 차선 아닌가?"
심장이 몇 번이고 철렁거리며 내려앉기를 반복하다 겨우 식당에 도착했다. 평소에 안 하던 역주행을 시도하다 잽싸게 정방향으로 들어왔을 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뭐에 씐 날이 분명하다.
식당 주차장에 들어서자 좁디좁은 주차 자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자신감은 없었지만 일단 일행을 내리고 나 혼자 진땀 흘리며 주차해 볼 요량이었는데, 웬 걸 장인어른께서 손수 나서서 주차요원을 자처하셨다.
아내에게 텔레파시를 여러 번 보내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아내..
장인어른의 혹독한 시선 앞에 주차 초보인 난 멘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필이면 후진할 때 갑자기 뒤로 오셔서 몇 번을 깜짝 놀랐는지 모르겠다. 급기야 장인어른도 내게 한 마디를 꺼내셨다.
"내려보게. 내가 할 테니."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사실!)"
안 괜찮은데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부서질 거 같은 정신을 겨우 붙잡은 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주차를 성공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손이 많이 가긴 하네.
문제는 내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버렸다는 것.
그냥 모든 걸 다 접고, 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밥이고 뭐고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사라지고 싶은 이 느낌.
안타깝지만 내 원망 1순위는 [아내]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나를 홀로 두고 그대는 사라져 버린 것이냐며, 귀에 대고 크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정신없지만 우울했던 (혼자만 우울했다.) 식사 후, 다시 한번 운전을 해서 집에 돌아왔다. 우리 부부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셨는지 장모님께서 아이들까지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셨다.
"휴.."
"미안해. 아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뭐. 내가 어떻게든 먼저 데리고 올라갔어야 했는데.."
선수 쳐서 말하는 아내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꽁해 있던 마음이 일부 풀어졌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쉽게 풀어져서는 안 돼‼
"엄.. 그러니까. 다음에는 이러지 않도록 부탁할게."
"오케이."
어떻게든 화난 척, 삐진 척하며 근엄해 보이려고 노력했건만 그럴수록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순간의 감정 때문에 저녁 분위기를 나쁘게 만든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좋은 사위가 되지는 못할 망정 초치는 사위가 돼서야 되겠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 또한 나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인 것을.
좋은 모습도, 싫은 모습도, 숨기고 싶은 모습도 사실은 전부가 다 나였다. 애써 보려 해도 애써지지 않던 순간. 내가 나인 것 같지 않던 순간. 그 모든 순간 또한 사실은 전부가 다 나였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 개선하고. 죽도록 싫은 게 있다면 밀어내자. 그렇게 모든 이에게서, 평범한 모든 순간에서도 존재하는 나를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