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날처럼

136 걸음

by 고성프리맨

"검소하고 착한 아이라네. 모나게 기르지 않았으니 잘 부탁해."


무뚝뚝해 보이는 장인어른의 입에서 나온 딸에 대한 이야기엔 애정이 묻어 있었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그런 딸을 바라보는 장모님의 눈가에는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미래의 사위에게 딸을 부탁하는 부모의 마음은 단 한마디로도 충분히 내게 전달됐다.


'이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겠구나.'


백 년의 세월을 함께 부부로서 지내진 못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마음만큼은 세월을 뛰어넘어 보리라.




"차렷! 열중 쉬엇! 차렷! 밥 차려왓!"


정답게 들려오는 은은한 아내의 목소리엔 오늘따라 힘이 들어가 있다. 백년가약을 맺기 전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륜안으로 땡그랗게 쳐다보는 여인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아들 둘에 남편 하나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그녀의 수행에 도움이 됐는지, 급속도로 레벨업을 해버렸다. 이제는 쳐다보는 눈빛 만으로도 나 정도는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 수 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오래전 이모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붙어 있던 [내 탓이오] 스티커를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초등학교 때라 그런지 별생각 없이 쓰여 있는 대로만 받아들였다. 늦게서야 알았지만 해당 스티커는 천주교 교인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매사에 참을 인을 새기듯 내 탓이오를 복창해야 하는 것인가. 억울해도 슬퍼도 기뻐도 전부 내 탓인 것인가. 정확한 의미는 모르기에 그저 쓰여 있는 대로 내 탓만 해야 하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 문득 [내 탓이오]에 대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최근 짜증 내는 빈도가 급격히 늘었음을 체감하면서부터다.


'이건 이래서 너의 탓이고, 저건 저래서 니 탓이야!'


언제나 나는 쏙 빠져 있었다. 순수 바닐라 그 자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제외시키고 일단은 아내 탓, 아이 탓부터 하고 봤다. 그 결과 우리 집의 평화는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기에 이르렀다.


"엄마! 옷 어딨어요?"

"밖에다 꺼내놨다."


잠시 후.


"뭐야 왜 그거 입었어? 밖에다 꺼내놨다고 했잖아."

"몰라요. 눈에 안보였어요!"


둘의 시선엔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OO야. 밥 먹어라."

"네~"

"OO야. 밥 먹어라."

"네네~"

"OO야. 밥 먹어라."

"네네네~"


참을 인 세 번이 지나도록 아이는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노호성을 질렀다.


"밥 먹으러 오라고 했지!!!!!!"

"네엣!!!!!!!!"


오고 가는 공방전 속에 다시 또 긴장이 감돌게 되었다.


'매사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서는 안돼.'


어째서 별거 아닌 걸로 우리는 이토록 지지고 볶고 화를 내고 있을까. 진짜로 별 게 아닌데. 혹시 내 성격이 별로라서 그런 건 아닐까? 혹은 우리 아이들이 유별나서?


정신을 놓고 멍해져 있을 즈음 어디선가 들렸던 말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렷! 열중 쉬엇! 차렷! 밥 차려왓!"


아차차.. 밥 차려 오라고 했었는데 딴생각을 잠시 해버렸구나.


"네네 갑니다요. 근데 우리 앞으로는 서로 조금씩 부드럽게 말하기로 해보는 게 어때?"

"너나 잘하세요."

"네 ^^ 당연한 일이지요."


밥을 먹으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별 거 아닌 일에 핏대를 세워가며 대화하는지.


"쩝쩝."

"어떻게 생각해?"

"쩝쩝."

"다정한 가족이 되면 참 좋겠는데."

"쩝쩝쩝."

"알겠어. 그런 뜻이었구나."

"뭘?"

"밥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줄.."

"나도 버거워. 애들이 말도 잘 안 듣고."


동시에 둘의 입에서 똑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저렇게 사나 몰라. 저럴 바엔 갈라서는 게 낫지 않아?"


사정을 모르고 바라보는 남의 가정사에 들이대는 잣대는 차가웠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안 좋은 상황을 겪어가며 살기를 원하진 않았을 거 같은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변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한때는 나 또한 무수히 차가운 시선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상황에 조소를 내비치곤 했던 거 같다. 막상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면서 많은 부분에서 느끼는 바가 생겼다.


어쩌면 모나게 길러지지 않았던 아내도 나를 만나 살다 보니 모나게 된 부분이 생긴 건 아닐까?

아이들도 내가 아빠가 아니었다면 말을 더 잘 들었을까?


"뭐얏?! 지금 내가 모났다는 거야?"

"아니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차암 ^^;"


가족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조금 지울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내 몸이 피곤한 만큼, 아내의 몸도 피곤함을 알아줬어야 했는데..

어린 시절 이해되지 않았던 어른들의 행동에 대해, 아이의 시선으로 한 번 생각해 볼걸..


언제나 생각은 쉽고 행동은 어렵다. 지금 글로 쓰고 있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겠지. 한 순간 확 바뀌기는 불가능할 테니 손쉽게 행동할 수 있는 것부터 오늘 당장 시도해 보자.


"아빠 하던 대로 해요.. 이상해."

"오빠? 너 뭐 질렀니??"


설령 억까를 당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결국 내가 꿈꾸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향대로 삶이 흘러갈 것임을 믿는다.


다시금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기 전 장인어른께서 내게 부탁했던 말을 되새겨 본다. 비록 세월 앞에 서로가 변해버린 부분은 있을지언정, 계속해서 변해가게 만든다면 그 또한 내 잘못이리라. 설렜던 처음을 상기하며 오늘은 좀 더 다정히 아내에게 다가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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