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걸음
주변인으로 변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굳이 내가 없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 자리에 있을 때엔 특히나 더 멋쩍게 느껴졌다. 억지로 웃음을 짓고, 나답지 않게 중언부언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주변인이 되기 싫다며 아득바득 우기는 노력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럴수록 마음의 상처만 커졌다.
"뭐 해? 어디 불편해?"
쭈뼛거리는 날 향해 누군가 말을 걸어도 부자연스러운 웃음과 말이 뒤따를 뿐이었다. 불편한 마음을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며 부여잡고 다시 부여잡았다.
'모든 불편함 따위.. 까짓 거 견디자.'
누구도 나의 불편함에 주목해 주는 이는 없었다. 서운했다. 티를 내지 않겠다며 이 악물고 버틴 내 탓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서운함이 생기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었다.
영겁 같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해방이다‼️
시계를 보니 불과 2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도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맞지 않는 옷, 꽉 조이는 신발을 드디어 풀어헤칠 수 있게 됐다.
구체적으로 상황 설명을 하려니 하남자스러워 보일 거 같아 망설여진다.
- 어차피 쓰려고 한걸 텐데 그냥 써요. 다 쓸 거면서~! 상남자도 아니잖아요?
상이든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저 중간만 가자.
중. 남. 자!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지 아내는 제법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처음에는 아내한테조차 나의 불편한 마음을 호소한 적이 없다 보니 뒤늦게 내가 "이러이러해서~ 불편했어."라고 말하면 화들짝 놀래기 일수였다.
"아니.. 뭘 그런 걸로 그렇게까지 불편해하고 그래..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해도 되잖아?"
어려서부터 눈치를 심하게 봐와서 그런지 나보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는 걸 더 두려워했던 습관이 남은 걸까?
생각해 보니 언제나 내 기분이 1순위는 아니었던 듯싶다. 화를 내건 불만을 표출하든 그건 후순위의 문제였다.
"그게 착한 척한다는 거야. 오빠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착한 줄 알겠지?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이걸 나만 알고 있으니 쯧쯧."
한번 형성된 기질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남은 여생도 계속 이런 성향으로 살아가게 되려나.
"아.. 아빠.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없죠?"
"응? 뭘 잘못해?"
"아니이~ 자꾸 아빠가 슬금슬금 쳐다보시길래요."
큰 아이의 발언을 그저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띠띠띠띠-
쿠당탕-
밖에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이들이 잽싸게 뛰어서 한 명은 화장실로 다른 한 명은 옷방으로 직행했다.
"죄송해요! 지금 이 닦아요~"
"미안해요! 지금 옷 입어요!"
...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걸 지금 알았어? 우리 집 모든 식구가 오빠 눈치 본다고‼"
'뭔가가 잘못됐는데.. 이건 바라던 게 아니라고.'
이 모습은 밖에서 내가 타인에게 하던 행동 그 자체였다. 눈치 보고 남의 감정을 우선시 여기던 모습. 어느 순간 나의 안 좋은 면이 자연스럽게 전승되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전승되어 버린 건가?
'막아야 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해.'
내 성향을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을 찾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눈 흘김 당한 아이와 아내는 어디 안양천이나 탄천이라도 가서 다른 사람을 흘겨보기라도 하려나?
내가 끊어내지 못한 약한 모습이 대를 이어 전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변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려나.
40대에 들어서자 나의 행동에 제약을 걸거나 옳은 말을 해주는 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는 게 말이 안 되는 나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만나는 이도 극히 적고, 거울치료나 본받을 사람마저 줄어드는 관계로 점점 나만의 세계를 견고히 구축하려 한다. 그렇게 구축된 나만의 세계에 가족까지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안돼! 그만!"
"오늘 모노드라마 잘 찍네?"
측은하게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이 보지 않았음에도 느껴졌다.
"어쩌다 이 화상을 만나서 내가 결혼을 해가지고! 그렇게 괴로워할 거면 좀 바뀌어야지. 애들을 오빠랑 똑같이 만들고 싶어?"
"아니.."
"이렇게 하면 똑같이 되는 거야. 노력을 해야지. 맨날 상상만 한다고 바뀌겠어?"
찾았다. 유일한 아군. 쓴소리의 달인.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후회한다.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무너뜨리자 내뱉은 한탄. [삼국사기]
의자왕에게 성충이 있었듯이 내게는 아내가 있구나. 만약 내가 아내의 말까지 무시해 버린다면? 내겐 삼천궁녀가 있지는 않으니 혈혈단신으로 낙화암에서 뛰어내리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뒤늦은 후회를 해서는 안된다 이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생님께 정답을 바라는 학생이 되어 아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해."
"어.. 어??"
"스스로 좀 알아서 잘하라고. 나한테 다 미루지 말고."
아뿔싸. 한방 맞았다. 이 와중에도 스스로 바뀌려 하기보다, 아내에게 의존하려 한 나 자신을 원망한다.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부족한 나의 잘못이다. 괜히 다른 데 가서 뺨 맞고 온 걸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게 감정을 토해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나 편하자고 주변을 희생시키는 최악의 수를 둔 것을 후회한다.
주변인이 되어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자리였다면 굳이 오래 있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닌가.
기분에 솔직한 것과 감정을 막 다루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내게 싫은 것이 있다면 가족에게도 강요하지 말자.
겉만 늙어가고 속은 한 없이 어려져 가는 역행을 하고 있구나. 이따 하교 후 아이들을 마주하게 되면 일단 말없이 꼭 안아줘야겠다. 일하고 돌아온 아내도 살포시 안아줘야겠다.
그들의 얼굴에 ???가 떠오르더라도 나부터 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