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걸음
힘이 빠지는 말은 오래 듣기가 힘들다. 말을 꺼낸 의도가 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해도 잘 안될 거야.."라는 결론으로 끝맺음이 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게다가 이미 발을 담그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상대가 걱정돼서 해주는 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안 없는 비관적인 의견은 그저 불평으로 그치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면으로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누군가에게 대안 없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직접 해본 적도 없이 풍문으로만 들었을 뿐인 말을, 사실인 것처럼 말했었다.
'아.. 과거의 내 죗값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맥 빠지는 이야기로 인해 의기소침해졌지만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니 쓴웃음만 지어졌다.
과거의 내가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비등했던 상대방이 나보다 앞서갈까 봐 두려웠던 마음이 존재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냥 이대로 비슷한 처지로 도토리 키재기를 해야 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날 앞질러가려 하는가?!'
아쉬운 모습이지만 한때의 나였고, 어쩌면 현재의 나일 수도 있을 모습. 자업자득임을 인정하고 반성할지어다. 그리고 면밀히 살펴보면 우려 섞인 그 목소리에 정답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걸러야 할 것만 잘 거른다면, 쓴소리는 약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최대한 긍정회로를 돌렸다. 그제야 가라앉은 마음이 한결 나아지기 시작했다.
법에서 중요하게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의도(意圖)]라 알고 있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본인만 알고 있는 계획 같은 것을 칭한다.
의도가 선했는지, 악했는지에 대해선 오로지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평소 빙빙 돌려 말하기를 좋아하는 난, 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길 원치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내 말을 듣다가 가끔 아내가 벌컥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냥 대놓고 말해! 그리고 지금 한말이 무슨 의도야 대체?"
나쁜 뜻이 아니었지만 이미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날 바라볼 때면, 서둘러 해명의 시간을 가진다.
"그게 사실은 말이지~"
아내의 눈이 점점 실눈캐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당신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분명 부정적으로 말한 게 분명해‼️"
"아니.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렇게 받아들이는가!"라고 시원하게 말을 해보는 상상도 해봤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그 말이 새어 나오진 않았다.
의도라는 것도 결국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임이 분명하다.
"아빠.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을까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잖아요."
"???"
큰 아이는 가끔 뜻 모를 이야기를 던질 때가 있다. 일단은 눈치 보게 만든 나의 탓이 1순위겠지만, 매사에 부정적인 경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비로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보니, 어떻게 하면 고쳐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잠깐 아빠랑 얘기 나눌까?"
"왜요? 저 또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빠는 말이지-"
아이의 표정에서는 지루함이 느껴졌다. 나의 의도가 어떻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지루함을 유발하는 대화가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꺼낸 이는 나였으나 동시에 눈치를 보는 것도 나였다.
"네네. 저 가도 될까요?"
"... 응."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제야 얼굴이 환해졌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대화가 어긋나다니. 문득 과거에 내가 어떻게 아버지와 대화했었는지, 그 모습이 떠올랐다.
'똑같았구나..'
아이에게 뭐라고 할 것이 아니었다. 나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말을 전해도 잔소리로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솔직히 말해줘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사주는 게 아니라 엄마가 사준 거죠? 빨리 비밀을 말해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뭐야아! 나도 알 거 다 안단 말이에요. 빨리 비밀을 불엇!"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는 아침부터 엄마를 쫓아다니며 산타할아버지의 비밀을 캐내려 하고 있었다. 옆에서 형은 히죽히죽 웃으며 팩트를 흘렸다.
"야. 엄마가 사주는 거 맞아. 산타할아버지 없어."
하지만 형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둘째는 끈덕지게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며 계속 물어봤다. 그 광경을 보다가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 싶어 둘째를 불렀다.
"왜요? 아빠가 말해주게요?"
"응. 귓속말로 해줄 테니 잘 들어."
꿀꺽- 허튼소리를 하려는 내가 침을 삼킨 소린지, 귀를 기울인 둘째의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를 기점으로 말을 이어갔다.
"실은.. 산타할머니가 사다 주셨어."
"아 재미없어‼️"
"진짜야. 왜 꼭 산타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데?"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둘째는 내게서 멀어졌다.
"아니 엄마! 빨리 말하라니까? 산타할아버지가 사준 거 아니지?"
거짓말을 잘 못하는 아내는 밀당에 실패해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옆에서 듣던 난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사실 둘째도 이미 경험으로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산타할아버지 한 명이 선물 나눠주고 다닌다는 말을 믿기엔 이미 커버린 건 아닐까? 그때 형이 말을 보탰다.
"다 엄마아빠 돈으로 사주는 거야. 고마워해야 해."
알 거 다 아는 형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내 마음을 파고들어 왔다. 의도하지 않은 순수한 말이 때로는 가장 강력하게 다가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