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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Oct 21. 2024

 차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145 걸음

차 한 모금이 입에 들어와 식도를 타 넘고선 위에 도달하자 그제야 뱃속에 온기가 퍼졌다. 오늘은 오전 시간 내내 잠만 자다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장염이 찾아온 까닭이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오랫동안 이 녀석과 헤어지고 싶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꽤나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분명 음식 탓일 거다.


'어제 뭘 먹었더라.'


차 두 모금을 마시자 멈춰 있던 머리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점심에 라멘을 먹었고 저녁엔 굴국밥과 남은 치킨 조각을 먹었지.'


장염이 자주, 많이 걸려본 입장에서 전날부터 약간의 느낌은 있었다. 장이 콕콕 쑤시는 느낌도 들었고, 살짝 얹힌 듯 더부룩한 느낌도 공존했다. 미련하게도 저녁때 참지 못하고 느끼한 음식을 먹어버려서 결국 이 사달이 나버린거겠지? 다시 한번 식욕 앞에 무릎 꿇은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몸에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절제를 못할 때면 이렇게 바로 증상이 나타나 버린다.




장이 언제부터 안 좋았는가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부터는 늘 그랬던 거 같다. 10대 땐 삼시세끼 고기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장염이 걸렸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 먹을 고기량을 그때 다 써버려서 지금의 장상태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20대는 건강이 보장된 나이였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으며, 날마다 고기를 먹어도 소화력에 크게 지장이 생기지도 않았다. 단지 10대 때에 비해 가끔 장염이 찾아올 뿐이었다.


30대에도 역시 고기를 끊지는 못했었다. 특히 결혼하기 전까진 이전의 식습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여전히 고기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미 20대 때보다 훨씬 잦은 장트러블을 겪고 있었다. 억지로 소화시키려다 위산의 역류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했고 한번 걸린 장염의 기간도 전에 비해 더 길어졌다.


이쯤 되면 눈치채야 정상인데. 여전히 난 먹던 음식만 먹으려는 관성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감히 상상해 보는데 만약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건강상태는 최악을 달리고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연애 때부터 느끼긴 했었지만 우리의 입맛은 참 많이 달랐다. 채식과 생선을 즐겨 먹는 아내와 음식 때문에 다툰 적도 많았다.


"나 돈까스 먹고 싶은데."

"오늘 족발이 땡기는데."


그럴 때면 아내의 반격기가 펼쳐졌다.


"난 국물 있는 요리 먹고 싶어."

"만날 때마다 고기타령이야. 자주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이토록 다른 입맛이라니. 둘 중에 한 명이 양보를 해야 그날의 데이트가 편했다. 그리고 그 몫은 주로 아내의 몫이 되었다.


"다음엔 국물요리 먹자! 아니면 채소나 버섯 많이 먹을 수 있는 샤부샤부 어때?"

"알겠어 알겠어."


물론 다음이 되면 난 또 고기얘기를 하겠지만, 당장 입에 고이는 침을 느끼며 빨리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대충 대답했다.




"오빤 나 일찍 미망인 만들 생각이야? 살고 싶으면 이제 식단 좀 바꿔."


결혼 후 정기적으로 배가 아프다며 고꾸라지는 날 볼 때마다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고기의 양을 줄이자. 하지만 먹던 습관이 어디 쉽게 사라지겠나. 마음과 달리 식사 시간만 되면 다시 고기 생각이 간절했다. 늘 먹어온 맛이라 뻔히 알고 있는데도 왜 이리 생각나는 건지.


"강제로라도 채소를 좀 먹어. 과일도 먹고."


그렇게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다 보니 이제는 꽤 식단이 변했다. 아예 고기를 안 먹는 식단은 아니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식단의 도움 때문인지 장염의 발생 빈도가 확실히 줄긴 했다.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내서 식단을 바꾸면 좋겠는데.'


마음과 달리 여전히 눈앞에 고기가 있으면 몸이 자동반응을 한다. 적게 먹어야지 마음먹었다가도 어느샌가 보면 못 참고 잔뜩 집어먹었다. 그리고 후회. 어제도 그랬다. 내게 주어진 적당량의 라멘과 차슈만 먹었으면 될 일을, 남긴 고기가 눈에 보이자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입에 넣어버렸다. 결과는 보다시피 탈이 나버렸다.




세 모금째 차를 마시자 찌르르했던 속이 약간은 풀리는 거 같다. 입에 뭐라도 들어오니 지끈거리던 머리도 한결 나아지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오전 시간을 잠으로 보낸 탓에 정신이 몽롱하다. 잠으로만 오전이 날아갔다는 생각을 하니 허탈감이 밀려온다.


네 모금째 호로록-


노트북을 폈다. 세 모금 마셨을 땐 속이 나아지는 거 같았는데 역시 기분 탓이었나 보다. 아직까진 썩 좋지 않다. 오늘은 죽을 먹어야겠어. 곧 죽어도 굶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배가 아파도 꿋꿋하게 먹겠다는 의지를 다른 곳에 쏟아부을 수 있다면 훨씬 좋겠구만.


다섯 모금-


어느새 찻잔을 가득 채웠던 차의 양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사이 점심을 챙겨 먹은 아내는 약속시간이 다되어서 밖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갔다 올 테니까 죽 끓여서 먹어. 물 붓고 10분 정도만 더 끓이면 될 거 같아. 굶지 말고 챙겨 먹어 갔다 온다~"

"조심히 다녀와."


여섯 모금을 마시자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흰 바탕의 노트북 화면에는 아무것도 쓰인 것 없이 환한 상태를 유지 중이다. 보통 이럴 때면 하는 상상이 하나 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짜잔 하고 텍스트가 채워져 있는 상상.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일곱 모금-

여덟 모금-

아홉 모금-

열 모금-


다 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노트북을 바라봤을 땐 놀랍게도 글이 쓰여 있었다.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다던 관우처럼, 차를 다 마시기 전에 글을 써낸 것이다. 물론 관우의 결과와 나의 결과는 천지차이겠지만. 여하튼 오늘도 썼다. 오전을 비록 날려먹었지만 그래도 쓴 게 어딘가. 비록 내 만족을 위해 쓰이는 글이지만 뭐 어떤가.


차를 다 마시고 나니 왠지 장도 한결 나아진 거 같다. 물론 여차하면 다시 나빠질 조짐이 보이니 음식 섭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을 가다듬은 뒤 아내가 준비해 준 죽을 한 그릇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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