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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Nov 17. 2024

불호령(沸好令)

그냥 써 보는 이야기 19

"넌 지금부터 무조건 나 좋아한다."

"어이 김 씨, 말 같잖은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오늘 뭐 잘못 먹었어?'


김찬웅.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후로 21살이 될 때까지 쭉 이어진 오래된 내 친구다. 요즘 들어 뭘 보고 다니는지 자꾸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한 번은 이런 말도 했었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날 좋아하게 될까?"

"너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너."

"뒤질래? 장난 그만치고."

"이게 장난 같아?"


계속 이런 식이다. 솔직히 이런 말을 계속 듣는 입장이 되면 상상 정도는 해볼 수 있다.


'내가 찬웅이랑 연인? 으.. 끔찍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 사이일 때가 역시 제일 잘 어울려.


그런데 고민이 있다면서 불러내 놓고는 지 혼자 술을 진탕 마셔서 취해버렸다. 그러더니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다.


"불호령! 그래 너에게 불호령을 내릴 테다. 이제부턴 무조건 나 좋아해 줘야 해. 알았지? 세연아? 세연아! 왜 대답이 없니? 너 나 싫어?"

"하아.. 그만해라? 참는데도 한계가 있거든? 너 나랑 연 끊고 싶어? 내가 왜 널 좋아해야 하는데?"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너.. 헤헤.. 앞으로 나 좋아해 줘라. 응? 부탁할게."


어이가 없어서 맥이 탁 풀려버렸다.


"됐고. 술이나 마시자. 이거 다 마시고 집에나 가. 더 취하면 놓고 갈 거야 그런 줄 알아."

"매정해. 내 마음도 모르고. 넌 왜 맨날 나한테 나쁘게 그러냐?"


'그러니까. 안된다고. 우리는 좋아해서는 안된다고.'


주절거리는 녀석을 뒤로하고 채워져 있던 잔을 빠르게 비웠다.


"술 잘 깨고 집에 얌전히 들어가라? 누나는 먼저 가마."

"야! 세연! 진짜 가? 갈 거야? 나 이렇게 취했는데 그냥 두고 간다고?"

"어. 술 깨고 알아서 잘 들어가. 나 더 이상 험한 거 못 보겠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녀석이 내 손을 확 잡아챘다.


"뭐 하냐? 이거 안 놔?"

"가..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농담이 심했지?"

"농담처럼 안 들렸는데? 너 좀 이상해. 지금 어차피 술 마셔서 대화도 안 통하는 거 같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이거 놔."

"거짓말 아닌데.."

"뭐래?"

"네가 나 좋아해 주면 안 돼? 안 되는 건가? 우리는 우정이라 이거지?"


어이가 없네. 우리 사이에 뭐가 있기라도 했어? 나도 모르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손부터 놔봐. 너 갑자기 요즘 왜 그러는데? 뭐 차였어? 그냥 막 아무 여자나 만나보고 싶고 그런 거야? 내가 여자니까 그냥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이라도 한 거야 뭐야? 우리 알고 지낸 시간만 해도 얼만데. 너 그런 거 다 깨져도 상관없어?"

"어. 상관없어. 그러다가 너 다른 남자한테 가버리면 어떡하라고."

"하.. 그러니까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이냐고."


내 말에 그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찬웅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렇지! 좋아해서 좋아한다는데 뭘 더 어떡하라고!"

"야! 쉬.. 쉿! 왜 이래? 다 쳐다보잖아.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너한테 미쳤다고."

"아.. 하아. 진정 좀 하고. 앉아봐. 하이씨. 오늘 왜 이러지 진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바람에 가게의 모든 눈이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이 새끼.. 미친 X이네. 갑자기 왜 지랄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문득 테이블에 놓인 병을 세어보니 소주가 자그마치 5병. 언제 이렇게 마신거지? 그나저나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진짜로 날 좋아한다고?'


방금까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패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리에 앉아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아 놓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야.. 너 왜 이래. 설마 우냐? 하아.. 돌겠네. 너 오늘 진짜 왜 그러는데? 연애가 잘 안 돼서 그래?"

"넌 진짜 못됐다. 내가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고. 내가 싫어서 그래?"

"어 X나 싫어. 우리 사이에 뭐가 있지도 않았는데 혼자 급발진하면 뭐 내가 '아이고 내가 찬웅이 마음을 몰랐네? 그동안 날 좋아해줘서 고마웠어.'라고 하기라도 할 줄 알았냐? 내가 뭐 네가 나 좋아해 줘!라고 하면 막 좋아해 주고 그래야 돼?"

"그래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술 깨면 X나 부끄러워질걸? 그냥 오늘은 집에 얌전히 들어가라. 택시 불러줄 테니 어서 타고 가."


술 취한 놈하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건 무리다. 속이 활활 타들어갔지만 꾹 참았다.


'제발.. 여기서 조금만 더 이상한 짓 하지 마라. 제발. 한 번만 더 XX짓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다행스럽게도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찬웅이는 얌전히 있었다. 정확하게는 머리를 처박은 채 질질 짜는 거였지만. 이 상황 모르는 누가 봐도 100% 차인 것처럼 보이지 않나? 어이가 없었다. 대체 우리 사이에 뭐가 있었다고 이러는지. 혼자 티 내고 혼자 소리 지르고 내가 좀 우습게 보이나?


"야 택시 타러 가자. 도착 1분 전. 여기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나중에 문자보고 잔금 보내라."

"후우.. 진짜로 난 너 좋아하는데."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그만해 한마디만 더하면 입 꿰매버린다?"


쪽-


"야! 이 미친 XX가 진짜!! 너 다신 나한테 연락하지 마!"


방심한 틈을 타 결국 저질러 버렸다. 솔직히 역겨워서 신고해 버릴까란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간의 정이 있으니.


"알아서 처 들어가!"


결국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뒤돌아섰다.


"나.. 이제부터 너 좋아할 거다. 너도 나 좋아해 주면 안 되냐? 아니지. 무조건 날 좋아해야 해! 무조건이야! 불호령을 내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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