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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그녀가 어색하지 않다.

그냥 써 보는 이야기 20

by 고성프리맨

'보아하니 저 사람인 듯?'


손을 들자 다행히 상대방도 나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해요. 일찍 퇴근해서 출발했는데 환승을 잘못해서 그만-"

"아하하 괜찮아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사실 난 40분 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이라 떨리기도 하고 미리 와 있는 게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참 성함이 경서.. 님? 맞죠?"

"맞아요. 어떻게 배 많이 고프시죠? 아 그리고 저보다 오빠신데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제가 바로는 말을 못 놓는 편이라. 조금만 시간 지나면 자연스럽게 될 거예요."

"네네. 생각했던 것보다 되게 멀끔하시네요?"


'대체 어떻게 생각했길래?'


"아! 나쁜 뜻이 아니라 동안이시라고요. 저도 나이가 좀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만났을 때 기대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서요. 너무 솔직한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여기서 10분 정도 걸으면 예약해 둔 가게가 있는데 혹시 양식도 괜찮아요?"

"전 가리는 거 없어요! 예약까지 했어요? 그렇다면 가요~"

"혹시 좋아하는 음식 아니면 다른 데로 가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주세요."

"에이 양식에 뭐 호불호가 있나요. 오늘 첨 만나는 자리니까 음식보다는 대화 나누기 편한 곳이면 전 다 좋아요."




이름 : 임경서

나이 : 33살

성격 : 지금까지 행동으로 봐선 상당히 외향적이고 텐션이 낮아 보이지는 않음.




'긴장 많이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먼저 다가와주는 성격이라 편하네.'


이태리 식당을 예약한 의도는 딱히 없었다. 그냥 소개팅에서 무난하게 갈만한 곳을 찾다 보니 평도 적당하고 가격대도 나쁘지 않아 선택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예약]이 가능했다는 점인데 룸 형태의 공간이 따로 제공되고 있어서 대화나누기도 좋을 거 같았다.




'무난하다.'


특별한 소개팅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진 대체로 무난하다. 음식도 무난하고 질문도 무난하고 분위기도 무난하달까.


'뭐.. 첫 만남부터 얼마나 특별하기를 기대했길래?'


"어때요?"

"예?"

"좀 지겹죠?"

"아.. 뭐 음식이 별로인가요?"

"그게 아니라. 뻔하잖아요. 소개팅이라고 들을 때부터 전 조금 불편하긴 했어요. 왠지 상상이 됐거든요. 오늘 온 식당만 해도 뻔한 상상에서 벗어나질 않는 게 너무 전형적이랄까요."


'내가 너무 재미없나?'


"아. 오빠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요. 그냥.. 이젠 소개팅으로 만나러 나오면 보통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제가 연애를 많이 해봐서 그런 게 아니고요. 아 이게 참 어떻게 말을 하지."

"괜찮아요. 다는 아닌데 대충 어떤 뜻인진 알 거 같기도 해요."

"그렇죠?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죠?! 솔직히 아.. 이러면 안 되긴 하는데. 제가 성격이 좀 리드하는 편이라서요. 그러니까 이게.. 막 내가 맘대로 끌고 다니고 이런 게 아니라."


경서는 한참 동안 변명과 의견을 번갈아가며 얘기했다. 나는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아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지 정도는 대충 알고는 있다.


"하아.. 오빠! 오빠도 말 좀 해. 나만 계속 이게.. 수습이 안되잖아요."

"왜~ 말 잘하는데."

"어?"

"왜??"

"반말했다!"

"......!"

"뭐야 반말할 줄 아네? 진작 말부터 놓으랬잖아요 그러게! 훨씬 낫다."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해버렸네. 그때부터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 느껴지던 거리감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푸하하! 거봐거봐! 내 말이 맞지? 사실 나 엄청 걱정했었어. 예전 같으면 6살 정도 나이차이면 부담스러워서 안 만나보겠다고 했을 텐데, 33살 정도 되니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거 있지?"

"뭔 소리야. 너 괜찮아~ 나야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나이지. 근데 너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솔직히 외모만 놓고 보면 경서는 이쁜 편에 속한다. 운동도 열심히 하는지 나에 비해 군살도 없어 보이고.


"인기? 이이인기이? 주변에 남자가 있어야 인기가 있든 말든 하지. 회사 집만 왔다 갔다 하는데 무슨. 아무 일도 안 생겨요. 근데 오빤 왜 나한테 갑자기 그런 말 꺼내?"

"아니 뭐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러니까.."

"뭐야 예의상 했다?"

"아니야. 이쁘게 생겨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헐.. 뭐지? 나 맘에 드나 보네?"


당돌하게 내 말을 받아치는 그녀의 눈빛이 내 눈으로 파고들어 오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또 왜 빨개지는 느낌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뭐야? 지금 부끄러워서 그런 거지?!"

"아.. 아오. 그만해. 덥네 여기."

"뭐야 난 추운데. 이상하네에?"


어떻게 해야 경서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까.


"밥 다 먹었으니 우리 카페라도 갈까?"

"말 돌리긴! 오빤 술은 안 좋아해?"

"어?"

"내가 뭐 이렇게 말 꺼냈다고 맨날 술 마시고 그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말고. 그냥 카페 말고 조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데 없을까 해서."

"아.. 나 술은 잘 못하는데. 뭐 칵테일 한잔 정도는 가능해."

"뭐야. 지금도 소개팅 코스프레 중이야? 우리 이제 좀 편해진 거 아니었어? 칵테이이일? 아니 뭐 진짜 좋아한다면 가도 되고."

"오늘 우리 처음 만난 거라고!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뭐! 싫어?"

"그런 건 아닌데. 그래 그럼 어디로 갈까?"

"나한테 맡겨볼래?"

"음.. 그러지 뭐."




"여기 가보자. 괜찮아?"


그녀가 이끈 곳은 이자카야였다.


"검색해 보니까 여기 오뎅탕 미쳤대. 배도 부르니까 우리 그냥 국물 해서 반주하는 게 어때?"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첫 만남에 오뎅이라. 뭐 상관없으려나.


"뭐 상관없지. 조용한 데 고를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자카야 정도면 조용하지 뭐. 여긴 내가 살게."

"아니 뭐 들어가기 전부터 그럴 필요야. 나도 오늘 두둑이 챙겨 왔는데?"

"그 돈 아꼈다가 장가갈 때 보태시고요."


시간은 아직 저녁 8시 20분 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우린 닷지석 대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오빠 오뎅탕 괜찮아?"

"응 나야 뭐 상관없어."

"메뉴 뭐 있나 좀 더 볼래? 그래도 오빠 좋아하는 거 있으면 하나 시켜. 내가 그 정도는 사줄 수 있다."


키오스크 화면에 오뎅탕(소)를 찍은 후 경서는 사케를 한 병 골랐다.


"너무 내 맘대로 골랐지? 오빠 사케 마셔봤어?"

"나 뭐. 몇 번 정도?"

"나랑 이거 나눠 마시자. 싫으면 다른 거 마셔도 괜찮아."

"난 어차피 많이 못 마셔서. 너 원하는 거 골라. 따라 마실게."

"딴말하기 없기!"




'젠장.. 취기가 오르네.'


분명 잘 못 마신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그녀의 페이스에 휘둘려 버렸다.


"뭐야~ 잘 마시네!"


모르겠다. 이미 주량은 살짝 넘어선 거 같긴 한데. 뭐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어느새 9시 30분이나 됐네.'


경서와의 대화는 잘 맞았다. 시답잖은 얘기만 나눈 거 같은데 깔깔거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소개팅이었는데. 이게 잘 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에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보다 나이 차가 안 느껴진다. 나 솔직히 좀 걱정했거든. 내년이면 오빠는 앞자리가 4로 바뀌는 사람이잖아?"

"아 여기서 나이는 왜 얘기해."

"사실이잖아. 난 내년에도 30대. 오빠는 40대 진입!"

"휴.."

"어허! 그만 마셔. 잘 못 마시는 사람이 어디서 허세를!"

"나이 얘기 좀 그만해."

"재밌어서 그랬지. 알았어. 기분 상한 거 아니지? 내가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해서."


취기가 오른 김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빤히 쳐다보면 부끄러워졌었는데 확실히 술의 힘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빤히 쳐다보는데도 홍당무처럼 빨개지진 않으니.


"왜? 뭐야. 느끼하게 쳐다봐 사람을?"


여기서 뭔가 임팩트 있는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말을 건네지. 호감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한 채 술을 마시고 있지도 않았겠지? 아닌가? 맞나?


"아.. 그러니까."

"......"


우리를 제외한 시공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분명 찰나의 순간이 분명한데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내일.. 뭐 해?"

"어?"

"내일 저녁 먹을래?"

"내일? 어.."


예상치 못한 걸까? 그녀가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그러자."


기분 탓이었을까.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나가는 듯했는데.


"다행..이다. 휴.."

"뭐가."

"거절할까 봐 걱정했어."

"내가? 나도 내일 밥 혼자 먹기 싫어서 걱정 중이었는데? 같이 먹자고 해줘서 고마웠어."

"그럼 내일 뭐 먹을래?"

"뭐야 벌써 정해?"

"내일은 너 좋아하는 걸로 먹자."

"흥! 오늘은 본인 취향으로 골랐나 보군."


시시콜콜하고 무용한 지금의 대화가 좋다. 여전히 취기가 돌고 있다. 살짝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 동반된다. 소개팅이라는 자리의 무게감이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뭐.. 남녀 사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굳이 앞서서 생각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내 앞에서 밝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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