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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지지 않는 말을 대하는 자세

그냥 써 보는 이야기 21

by 고성프리맨

"저...... 티타임 오랜만에 하실래요?"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S를 바라봤다. 그는 나의 오랜 동료이면서 가장 확실하게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정도 업력을 쌓다 보면 굳이 많은 문장을 말하지 않아도 깨닫거나 알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슬프게도 그게 지금이다.


"좋아요. 지금은 회의가 있으니 이따가 오후 3시 정도에 괜찮아요?"

"네. 그럼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S도."


그와의 짧은 대화 후 문득 주변을 챙기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늦었지 늦었어.'


예방조치란 원래 일어나기 전에 했어야 하는 법. 병이 생기고 난 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진작에 끝난 S와의 대화를 뒤로한 채 독백처럼 이어지는 나만의 질답이 이어졌다.


- B. 왜 예전처럼 행동하지 않아요?

-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 S. 내 모든 일과를 그대에게 공유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달까요. B는 우리 팀의 리더인데 어째서 우리를 사지로.. 죄송해요 궁지로 몰아넣는 건지. 이유가 있으면 설명해 주면 되잖아요.


"회의 갑시다‼"


자칫 길어질뻔한 속에서의 대화는 우렁찬 회의참석 소리와 함께 갈무리되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 솔직히 말해 입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거 같은데 꼴에 남자랍시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자!" 정신이 발동했다.


"B 결정을 해야 해요. 우리는 굴러온 돌이고 여기서 키를 잡지 않으면 다시 굴려질 뿐이라고요."

"그래도.. 나는 좀."

"답답해. 생사의 문제라니까 그러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선택인데 못할 게 뭐예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찾아왔다. 항상 잠식되어 있는 빙하의 밑부분처럼 지내온 삶의 시간이 길었기에, 수면 위로 나를 드러내는 일에는 도무지 용기가 생기질 않는다. 그렇다고 부족하고 떨고 있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결정해야 해요. B가 안 정하면 전 떠납니다."

"흐음......"


말이란 것도 묘한 녀석인 게 오래될수록 좋아지는 술처럼 숙성이 된다. 솔직히 얻어걸린 거지만 내가 뜸 들이면 뜸 들일수록 주변에서 더 안달복달했다.


"결정-'

"그래요 내가 해볼게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름 크다고 생각한 결정을 내렸다. 결정은 결과를 가져올 테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닐 테니 일단은 안심하자.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의 시간 내내 딴생각을 했다. 여느 때의 회의처럼 제대로 된 결정은 나오지 않았고, 이것저것 트집 잡는 이야기로 변질되더니, 논의하려던 주제와는 무관한 추가 안건만 늘어났다.


"B는 잠깐 따로 얘기 좀."

"네."


K는 어두운 얼굴로 내게 나머지 공부를 명했다. 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은 잠시 내게 고정되었는데, 누구는 한심하게 쳐다보고, 어떤 이는 질투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봤으며, 얼마 전 조언을 해줬던 L은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모두가 퇴장한 회의실은 적막하다 못해 진공처럼 먹먹하게 느껴졌다.


"휴우... 시X. X 같아서 못해먹겠네요 B."

"......"

"내 앞에선 편하게 해도 돼요. 근데 그걸 알아야 해요. 능력의 증명이 필요한 시기라는 거. 아마 계속해서 보여줘야 될 거야."

"네."

"...... 갑시다. 저녁에 약속 있어요?"

"없어요."

"그럼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죠."

"네 그럼 이따 연락 주세요."




멍한 얼굴로 회의실을 나오는 중 휴대전화에 알람이 떴다.


[B. 나 좀 봅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게요.]


일방적인 의사 전달. 하지만 내게 메시지 보낸 C의 마음을 건드려선 안된다. 현재 그는 내게 적대적이나 분명 증명만 해낸다면 반드시 내 편으로 돌아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게 결국 이권에 따라 형성되는 문제 아니겠나.


"여기요.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보면 얼굴 보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잖아요. 우리는 각자가 바쁜 사람이고 책임져야 할 식구도 많으니."


그의 화술은 여전히 좋다. 반면 내 얼굴은 정직에 가깝다. 기분이 좋으면 웃음이 생기고, 반대의 상황엔 굳어지는 탓이다. 나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은 계속됐다.


"휴우.. 힘들죠? 이거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형님, 아우 하면서 싸우고 웃고 떠들고 하다 보면 다 해결되는 건데 그쵸오? 이게 다 얼굴 볼 일이 없어서 그렇다니까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1층으로 날 데려간 그는 허락 없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말을 이어갔다.


"B는 B의 일을 잘하면 되고, 나는 나의 일을 잘하면 되겠죠?"

"네."

"그런데 말이야. B가 일을 해내지 못하니까 우리 일이 진행이 되질 않잖습니까아?"


나도 모르게 '그거야..'라며 변명 아닌 변명의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과연 이제는 제법 참는 법을 익힌 것일까. 내가 별 대응 없이 우두커니 바라만 보자 머쓱해졌는지 C는 딴 곳을 살피다 황급히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니까. 되게 해 봅시다. 그거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일로 말하는 사이지 뭐 애초에 아는 사이도 아니었잖수? 그리고 일이 잘되면 그때부터 친해지는 거라니까. 그러면 앓던 이도 빠지고 문제도 전부 해결되고 아주 스무스~하게 그래 스무스하게 척척 일이 되는 거라고. 하하! 갑시다. 언제든 지원 필요하면 얘기 주시고."

"걱정 마세요. 저도 인생을 걸고 있으니."

"인생을 걸었다라. 그래 잘해봅시다. 믿고 있을게요."


말과 달리 그의 눈빛은 불신에 차 있었지만, 굳이 그 부분을 꼬집어서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애초부터 내가 잘하면 되는 일이다.




[15:00]


"바빠요?"

"아 벌써 시간이.. 아.. 이거 조금만 더 하면.. 아니다. 가시죠."


몰입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하나 그와 정한 약속 시간이 다가왔으니. 회사 밖으로 나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어정쩡한 오후 3시였기에 손님도 거의 없어서 조용했다.


"뭐 마실래요?"

"전 그럼 이걸로."


주문 후 자리로 돌아와 마주 앉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음에도 오늘따라 유난히 어색하다. 침묵이 길어지려 했다. 평소의 나라면 침묵을 받아들였을 텐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요즘 이렇게 대화 나눈 게 언제였는지 이러다 얼굴도 까먹겠다 그쵸?"

"B가 워낙 바쁘시니까 어쩔 수 없죠."

"시기가 시기니까요. S도 마찬가지잖아요."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에요. 앉아 있어요."


음료를 가지러 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평소 순발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이번엔 순발력 따위로 틀어막을 순 없을 게 분명하다. 머리가 복잡하다. 증명이 필요한 이 순간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을 S의 입으로 듣게 된다면 '우리 괜찮을까?' 좀 더 솔직해지자.


'나 괜찮을까?'


멈춰지길 바랐던 순간은 결국 찾아왔다.


"짐작하셨겠지만 저 그만두려고요."

"......"

"죄송해요."

"죄송할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직장인은 누구나 겪는 일이잖아요."


죄송하다에 담긴 의미는 중의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째로, 우리는 오래 지내온 만큼 어느 정도 서로를 생각하는 배려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비록 회사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남겨질 나를 걱정해 준거라 믿는다.


둘째로, 지금 맡아서 하고 있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함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은 그가 아닌 내가 방법을 찾아내야겠지. 그러라고 회사가 내게 돈을 주고 있으니까.


셋째로,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의 미안함을 잘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리라. 나아가 K를 비롯한 모든 이에게도.


"걱정 말아요. 고생 많았어. 진심이야. 그리고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아......"


'한 번은 잡았어야 할까? 혹시 단번에 수락하는 내게 그는 실망했을까?'


때론 말하지 않고 삼켜야만 하는 그런 문장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말로 전해지지 않는 문장 따윈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않겠지만, 알면서도 나는 생성된 수많은 문장을 마음속에 삼켰다.


남겨진 차를 절반도 마시지 않은 채 우리는 대화의 갈피를 잃었다. 아니 확실히 이해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날까요?"

"B... 미안해요. 마지막 날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 놓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에게 약한 미소를 보냈다. 그가 마지막 말을 전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올곧음을 믿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미안하지만 B가 아닌 다른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탈이 불러일으킬 효과를 최소화해야 하고, 어떻게든 일은 돌아가게 해야 한다.


동석하지 않은 여러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 내 주위를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조소를 보내는 이, 손가락질과 함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쳐다보는 이, 측은한 눈빛, 머리를 쥐어뜯는 괴로운 표정. 다양하지만 그 안에 긍정적으로 보이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아.. 네네. 잠깐 어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려다 주저앉았다. 추한 꼴을 보였네.


"괜찮아요. 잘될 거니까요. S도 내 옆에서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 많은 말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전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삼켜버린 말)이 공존한 채 오후 3시의 만남도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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