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걸음
'필사가 유행이라던데.'
평소 유행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다른 작가가 쓴 글을 직접 베껴 써 보는 과정인 [필사]엔 관심이 있었다. 지금까지 필사를 진행해 본 적은 딱 한번 있었는데, 직접 쓰지 않고 키보드로 쳐서 기록했다. 읽을 때는 짧게 느껴졌던 글이었는데 필사를 해보니 쳐도 쳐도 끝이 없는 느낌이 들며, 나중에는 못해먹겠다로 생각이 변했다.
그렇게 필사는 내게서 멀어졌는데, 최근 온라인상으로만 (혼자서만)알고 지내던 웹소설 작가님이 공모전에 입상을 했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다. 그분이 이런저런 소감을 써 놓으시고 마지막에 '일 년 이상 필사만 해왔을 뿐인데..'라는 느낌의 글을 써놓으신 걸 읽게 됐다. 당연히 필사 외에도 숱한 노력을 하셨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느끼는 나로선 필사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 웹소설 꾸준히 쓰고는 있는 거죠?
"..."
- 설마.. 쓰지도 않으면서 실력이 정체됐다고 하는 거 아니겠죠?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여전히 소재 핑계를 대며 손도 못 대고 있다. 핑계 대는 김에 조금 더 보태면 길게 이어지는 내용을 못 쓴다에 가깝달까. 여하튼 부끄러울 따름이다.
- 그 정도면 웹소설 쓰고 있다는 얘기는 관둬야 하지 않나요?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내뱉은 말도 있다.
"내가 웹소설로 말이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벌어 보겠어. 아르바이트 비용 정도만이라도."
처음에는 눈을 반짝 거리며 응원한다던 아내의 눈빛이, 어느 순간부터는 초점 없는 흐릿한 눈빛이 되어버렸다. 보여준 게 없어서인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전부 내 탓이지 아내에겐 그 어떤 문제가 없다.
비유하기도 부끄럽지만 살짝 해보자면.
출애굽 시켜 이스라엘 땅으로 민족을 이동시키던 모세가 매 순간 [증명]을 해내며 사람들의 의심을 지워내야 했던 과정과 비슷하달까?
- 어딜 감히 [모세]님을 들먹여?!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까칠하시긴.
알고는 있다. 웹소설 작가로 뭔가를 해보겠다면 날마다 1화 씩이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이자 증명의 과정인 것이다. 현실의 난 증명을 하지 않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귀찮더라도 날마다 필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은 없다. 필사를 1번 해봤을 뿐인데 그때 기억이 너무 안 좋았다. 목과 어깨는 너무 뻐근하고, 눈도 침침해지는 것이, 모든 게 불편하고 괴로웠던 탓이다.
- 아니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할 거 아니요!
맞는 말이다. 웹소설을 직접 쓰지 않는다면 베껴 쓰기라도 해 보는 게 그나마 실력 향상의 길 아닐까 싶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보단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다만 마음먹기가 너무 힘들다. 시간도 남아돌면서 30-60분 정도 투자해 베껴 쓰는 건 못하겠다?
"예끼 이 사람아!"
'그런데 필사한다 해서 실력이 는다는 보장이 있긴 하고?'
해보기 전부터 치열하게 안 하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내는 걸 보니, 역시 오늘도 든든하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의 표본이 여기 있다.
'해볼까? 말까?' 고민될 땐 일단 해보는 게 보통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럼 망설일 필요 없잖아?'
하아.. 진짜 하기 싫은데. 그래도 해보는 게 낫겠지?
근력 운동도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조금씩 하다 보니 깨작거리기라도 하게 된 것처럼, 귀찮음을 조금만 견뎌내고 필사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래. 내친김에 오늘 필사 한번 해보자.
어릴 때 아버지가 해주던 말 중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꿰뚫는다."
단단한 바위 앞에 물 한 방울은 얼마나 보잘것없단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방울씩 물을 떨어뜨리는 노력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나고 나니 아쉽다. 물론 운 좋게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갖은 핑계를 대며 노력을 저 멀리 했을 게 뻔하지만, 아쉬운 건 아쉽다. 그래도 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포기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지만, 꾸준히 할 수 있는 걸 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조금만 덜 귀찮아하자. 어차피 필사를 하든 안 하든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버릴 테니.
요즘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시키려 글을 쓰는 거 같다. 나아가 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잃어버린 동기부여의 의지를 가지셨으면 한다. 어쩌면 내 글을 읽는 그대보다, 쓰고 있는 내가 훨씬 보잘것없을 테니,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움직여보려는 나를 보고 위안 삼았으면 좋겠다.
- 내가 당신보다 더 열심히 사는 거에 대해선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으니 걱정 마쇼.
다행이다.
아무튼 내뱉은 말의 무게를 느끼며 견뎌내기 위한 나만의 수행을 해보려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잘못되었더라도 직접 겪어내 볼 생각이다. 시행착오만 겪다가 끝내기엔 아까운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해보기 전엔 알 수가 없는 것을. 직접 행동하고 겪음으로써 세상의 단상을 알아가야만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