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걸음
늘 그렇지만 시작이 참 어렵다.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을 만도 하건만 매일이 힘들고 어려운 건 도통 나아지질 않는다. 처음에는 [소재의 부족]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평상시에도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며, 자질구레한 상상도 기록해 놓았다.
'오늘따라 글이 안 써지는데.'
언제는 잘 써진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잘 써지는 날이 오히려 극소수에 가까웠다. 그래도 메모해 놓은 내용을 살펴보다 보면 '바로 이것!'하고 선택되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가 무너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꽤 많이 메모해 놨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적어 보였고, 쓸만해 보이는 기록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새 옷을 사도사도 막상 입을 옷이 없다고 느껴지는 기분처럼 말이다.
'그래도 쓰기로 했다면 쓰는 거다. 오늘이 가기 전까지만 쓰면 되잖아.'
스스로와의 약속이기에 지키려 한다. 지킬 테다. 어쩌면 스스로 세워 놓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에 내 하루는 글과 생사를 같이한다.
- 오버하긴.
[동기부여]란게 그렇다. 어느 정도 스스로를 취하게 만들어야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내게는 맞는 방법인 거 같다.
스스로 정해놓은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한 노력. 지키고 나서 느껴지는 안락함. 어쩌면 내 성향은 다소 가학적 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찾아오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크게 변하진 않을 거 같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고.
어찌 되었건 사람으로서 느껴지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세상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정말 많고, 노력의 질과 양 또한 나의 것을 뛰어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지켜나가고 있는 오늘의 다짐과 행동이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의심이 생긴다.
'새로운 거 찾을 때가 된 건가.'
생각은 이렇게 해도 새로운 게 뭐가 있을지 감도 오질 않는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던 때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그나마 하던 걸 지켜나가는 게 고작이다. 상황이 내게 불리하게 작용할수록 자신감도 점점 떨어지는데, '빨리 이뤄야 하는 거 아닐까?'라며 초조함까지 들이닥쳐온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알기에 불안과 초조가 늘 주위에 퍼져있다. 이룬 것은 극히 적고, 이뤄나가고 싶은 꿈은 크기만 하고, 이대로..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을까. 글을 통해 그런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쓰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털어놓고 새롭고 발전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망상을 잠재우기 가장 좋은 건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생계와 직결되는 일. 하루하루 밥벌이를 하기 위해 치열하게 지내던 일터. 아침 일찍 출근해서 어둑어둑해질 때 집에 들어갈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잠깐 보고, 별다른 대화 없이 지친 우리 부부는 일찍 잠에 들었다. 그래도 다달이 들어올 [월급]은 신선한 피의 공급과도 같아서, 우리의 앞날이 조금씩 나아지겠구나란 희망을 심어주었다.
일에 심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탐내고 가지고 싶어 하는 이도 분명 있을 텐데,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회사일 외에 다른 무엇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해 온 세포를 집중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급여는 상승했고, 저축과 약간의 투자를 통해 살림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살아간다면 나쁘지 않은 삶이겠어.'
나쁘지 않은 삶의 이명이 [좋은 삶]이 되지는 않는다. 이번 생이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지켜나가야 할 가족이 있고, 그것이 가장의 무게다. 잘못된 나의 선택 하나가 우리에게 위기를 불러온다.
망상이 생겨날 여지도 차단시켰다. 오로지 선택과 집중을 통한 일을 해나가야만 한다.
'꿈이었나?'
너무나도 생생한 것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많은 게 그리웠다. 바쁘게 생활하고 동료들과 치열하게 일을 해나가던 과거. 비록 그 속에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은 한참 뒤로 우선순위가 밀려있었지만, 대신 [돈]은 벌어오지 않았었나. 나의 피, 땀, 눈물로 벌어오는 돈이야말로 우리 가족과 나의 미래 아니겠는가.
그러다 문득 꿈속의 내 얼굴이 떠올랐다. 행복함을 세뇌시키며 일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것과 달리 표정이 어두웠던 까닭에서다.
- 본인만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오.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재능을 가진 이는 넘쳤었고, 압도적인 노력의 질과 양으로 기를 죽이는 이들이 있었다.
미화와 왜곡된 기억으로 과거를 회상하지만, 당시에도 늘 고민이 있었다. 언제나 평탄한 삶은 없었다. 단지 행복했던 기억만 떠올리는 내가 있을 뿐이다. 행복의 기억마저 진짜로 행복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 쓰고자 하는 기록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
쓰면서도 도통 모르겠다. 하루키 선생님은 쓰면서 정리한다고 하던데. 나는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쓰면서 정리는커녕 '뭘 쓰고 있지?'란 생각만 든다.
쓰는 게 참 힘든 날이다.
이럴 땐 정말 안 쓰고 싶다.
차라리 이런 날엔 [대리만족]이나 느끼게 타인의 글을 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썼던 글을 쭉 읽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타인은 지나간 과거의 나도 해당된다. 부끄럽게 보이는 언젠가의 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었지? 싶은 또 언젠가의 나, 오늘처럼 고민을 거듭하다 머리를 쥐어뜯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나. 다양한 과거의 나를 마주했다.
나였었던 그 무엇이 시간이 지나 정말로 [타인]처럼 느껴졌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내쉬었다. 잠시 읽던 행동을 멈추고, 다시 노트북의 글쓰기 화면으로 돌아왔다.
"읽을 땐 읽더라도, 마무리는 짓자고."
오늘은 참 쓰는 게 힘든 날이다.
이런 날엔 쓰기 대신 읽기를 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대리만족을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