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걸음
"아침 먹어~"
오늘 아침당번은 나였지만, 귀찮아서 당번교체를 요구했다. 조금 툴툴대긴 했지만 아내는 흔쾌히 교대해 줬다. 마침 배도 슬슬 고파지던 참이었다.
"어‼️"
"왜? 뭐 잘못됐어?"
'어제에 이어 오늘의 메뉴도 [된장찌개]...... 구나.'
세끼 연속으로 된찌를 먹는다 생각하니 갑자기 침울해졌다. 분명 먹으면 맛도 좋고, 속도 편할 텐데.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음을 감지한 아내가 째릿하고 쳐다봤다.
"하아......."
이 와중에 아이들은 짭짭거리며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내 메뉴와 달리 아이의 메뉴는 [스팸 + 계란프라이]가 조화롭게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반창 투정이야? 삼식이 남편 주제에???"
"하아......."
깊은숨을 토해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딸칵-
"아 진짜!"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내는 험한 말을 더 꺼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응전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때 밥 먹던 작은 아이가 말하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엄마. 아빠 왜 화났어요?"
"야. 엄마가 또 된장찌개 줘서 그런 거야."
방 안에서 의도치 않게 대화를 듣고 있던 난,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
'틀린 말이 하나도 없잖아?'
아이의 눈에 아버지는 된장찌개를 여러 번 먹으면 [화내는 사람]이 되어있음이 분명하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궁색하지만) "제가 국물 요리를 그닥... 좋아하진 않아서요."라고 할 수밖에. 그리고 아이가 먹는 스팸과 계란이 너무 맛있어 보였다.
등교를 위해 아이와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걸었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식탁 위엔 식어빠진 밥 한 공기와 먹다 남은 스팸 4조각이 놓여 있었다. 순간 내 모습과 겹치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40대의 백수 아저씨는 식은 스팸 몇 조각에도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됐다.
'너나 나나 같은 신세구나.'
-아니. 갑갑하네. 요즘 세상에 아내에게 그딴 식으로 행동하다간 큰일 나는 거 몰라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먹으시던가!
"......."
오늘따라 유달리 침묵을 하게 되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다 큰 성인이 된장찌개 또 나왔다고 밥투정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내네요.)
저벅저벅-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아내가 집으로 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순간 망설였다.
'들어가 있을까? 이대로 있을까? 표정은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새, 문을 열고 아내가 들어왔다.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게 멍 때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얼굴을 본다면 어이없어서 웃음이 터질 거 같아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도 내 주위를 서성인다.
야생에서 사냥감을 앞에 둔 톰슨가젤과 사자의 대치양상과도 비슷하달까.
-아닌데요? 다른 동물도 아니고 가젤이라면 사자가 굳이 대치하지 않고 바로 돌진할 텐데?
말이 그렇다는 거다. 여하튼 몇 초, 몇 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번 말할 타이밍을 놓치자 대치시간이 길어지기만 했다. 갑갑하고 어이없고 부끄러운 마음의 공존. 하지만 이 순간 내 마지막 자존감과도 같은 [침묵]을 지키고야 말 테다.
"아침부터 소리 질러서 미안해."
"어? (언제 소리를 질렀지??) 어..."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고?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은데.'
내가 너무 상황에 심취해 있었던가. 분명 식사 투정 부린 내 모습 밖에는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추가로 떠올려보면 아이들의 디스?
"나도 미안해. 반찬 투정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똑같은 걸 세끼 연속 먹으려니까 좀 그렇더라고. 된찌가 맛은 분명 있었는데, 하아 이게 기분이."
그렇다. 참 별 것도 아닌 [기분의 문제]였다. 기분이란 놈은 참 묘해서 40대가 되었건, 10대가 되었건 한 순간에 유치함의 끝을 달리게 만들어 버린달까.
"그거 알아? oo가 아침에 아빠 된장찌개 또 나와서 화났다는 형말듣고 어이없어하는 표정 지은 거?"
"....... 정말?"
"응. 오빠도 알잖아. 우리 애들은 주면 주는 대로 잘 먹는 거. 오빠만 안 그래."
하마터면 다시 말줄임표를 쓸뻔했다.
"미안해.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는데."
"괜찮아. 나도 소리 질렀는데 뭐."
'내 기억엔 없었지만 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지 뭐.'
결국 돌고 돌아 우리의 아침은 [된장찌개 + 남은 스팸조각 + 김자반]으로 당첨.
한입 먹는 순간, 입에 퍼지는 감칠맛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빈 그릇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렇게 잘 먹을 거였으면서 투정은 왜 부린 건지.
"오빠 덕에 아침부터 과식하네. 고마워."
약속이 있었던 아내는 카페에서 브런치처럼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었던 거 같은데, 내 [기분]을 맞춰주느라 같이 먹어줬다.
아침부터 우리 사이에 돌았던 냉기는 어느새 걷혔다. 사실 일방적으로 내가 뿜어내는 냉기였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이렇게 잘 먹을 거였으면서 대체 왜 그런 건지. 지나고 나면 참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유만 덩그러니 남아 과거의 내 선택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다.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 진다. 하다못해 애들한테도 찌개 때문에 화내는 아빠로 낙인찍혀 버린 거 아닌가.
그래도 그 덕에 글을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어째 여러 번 연속으로 먹는 찌개엔 화내면서, 매일 쓰는 글에는 투정 안 부리는지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이상 오늘의 배부른 백수남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