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걸음
요즘 나를 위한 투자(?)가 아닌 지름을 조금 했다.
"들어오는 건 없는데 나가는 것만 생겨서 너무 좋네. 내가 아주 남편복을 타고났어.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보다 ^-^..."
"그렇게까지 칭찬해 줄 필요는⎯"
"진실의 방으로."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앞으로 모든 결제권한을 당신께 드리겠사오니-"
"이제야 착해졌네. 진작에 그랬어야지."
말은 이렇게 했어도 [용서가 허락보다 쉽다]는 진리는 통했다. 굳이 따지자면 비싼 지름도 아닌 나름의 목적성을 가진 소비였달까.
-뭘 샀는데요?
정말 별 거 아니다. 솔직히 내가 산 건 매니아 측에서 보면 코웃음 칠만한 레벨의 물건.
-드럽게 뜸 들이네.
"......"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키보드???
맞다. 그것도 무려 [인체공학]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제품이다!
-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은.
그렇다. 솔직히 별 것 아니다. 그런데 왜 이리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느냐? 바로 나를 위해 산 제품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필사까지 하다 보니 하루에 10,000자 이상 칠 일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손목의 부하가 가중되기 시작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프로그래머로 생활할 때부터 지독히 달고 살아온 손목 통증이 문제였다.
사실 업계에서 나 정도면 양호한 편(?)이랄까. 고질적인 손목, 허리, 어깨, 목과 관련된 질환을 달고 사는 게 바로 프로그래머의 숙명. 추가로 위장질환도 포함시키겠다.
-꼭 프로그래머라서 그런 건 아닐 거 같은데요? 모든 직업마다 각자의 고충과 직업병이 존재하는 법.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나로선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처럼 느껴졌었다. 나도 아프고 쟤도 아프고 모두가 아픈 세상. 그야말로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겠다. 그래도 장점을 하나 꼽는다면, [재미]가 있었다는 것.
-돈도 벌었겠죠.
그렇다. 돈도 벌었다. 재미도 있는데 돈도 번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나. 그러니 허리가 굽고 배가 ET처럼 튀어나와도 일을 했던 거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모습에 해당된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잘하는 프로페셔널한 분도 많다.
여하튼 오랜만에 산 키보드가 도착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업계를 떠나면서 다시는 키보드 따위(?)의 제품에 눈독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었다.
'집에서 쉬면서 타자를 쳐봤자 몇 시간이나 치겠다고.'
그런 내 생각을 우습게 뒤집은 건 [글쓰기] 덕이 컸다. 글은 머리로 생각하고 창조하는 부산물이지만 실제로 써보면 가장 큰 고생을 하는 게 [몸]이다. 키보드를 칠 때마다 통증이 전달되는 느낌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리라.
예전에 사용하던 기계식 키보드도 남아있긴 하다. 그 제품을 사용해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유선이라 싫어."
-배가 불렀구만!
절대로 과소비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단지 구불구불한 선이 내 책상을 어지럽히는 꼴을 보기가 싫었을 뿐이다. 추가로 새로운 제품도 이참에 써보고.
하지만 소비를 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제품은 내게 정말로 필요한 제품이다!"
"이 제품은 내 손목 건강을 위한 제품이다!"
"이 제품으로 인해 앞으로 나의 글쓰기는 쾌적해질 것이다!"
"앨리스 배열이 적용됐다더구만! (근데 그게 뭐지?)"
"매크로 적용 가능한 키도 5개나 존재한대! (어쩌라고?)"
-잠깐만.. 이거 이거. 혹시 체험단 한다더니 협찬받은 거?
아니다. 순수히 내 의지와 돈을 태워 샀다. 믿어줬으면 좋겠다. 협찬으로 이런 제품을 받을 수 있는 급이 안된다.
-그건 그렇지.
오늘로써 두 번째 타건 중이다. 분명 어제는 굉장히 뻑뻑하고 오타도 많이 났었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키감이 괜찮다. 오타율도 줄었으며 제법 보지 않고 키보드의 이곳저곳을 건드릴 수 있게 됐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구나.
실제로 손목이 편해졌나 하면 조금은 그런 기분이 든다. 물론 두 번 써본 상태에서 속단하기엔 이르지만 아직까진 플라시보 효과의 영향권하에 있을 시간대니 이해해 주기를.
여기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때는 지름의 여흥도 사라질 거다. 지금의 기쁨 또한 퇴색되기 시작하며 또 다른 지름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이 인간... 이미 살 목록 정리 다해놓은 거 같은데?
맞다. 실은 이미 어느 정도 리스트업이 되어있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지금 당장 지를 계획은 없고 차근차근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의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진행할 생각이다.
"음... 다음으로 뭘 사고 싶은가 하면 말이죠."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내 공간]이니 그냥 써보도록 하겠다.
1. 매직 트랙패드
2. DJI Mic Mini
3. 여기서부턴 비밀.
트랙패드는 오래전부터 하나쯤 갖고 싶었긴 한데 기회가 닿지 않았었다. 동료들이 잘 사용하는 거 보고선 50% 할인가로 내게 넘기라는 망언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돌아오는 건 치켜올려진 중지뿐이었다.
"나 당신에게 실망했어. 흥. 우리가 고작 이런 사이였던가?"
"어. 꺼져."
그렇게 우리 관계는 파투 났다. 물론 고작 트랙패드 때문이 아니긴 하다만.
-인성보소.
안 산 이유가 있긴 하다. 첫 번째로는 가격대가 생각보다 높다고 생각했었고, 다음으로는 사치품처럼 여겨져서였다. 내가 주로 노트북을 사용했던고로 트랙패드를 굳이 사지 않아도 붙어있는 패드를 이용하면 되니 따로 사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까진 아니지만 대충 집에서 일해도 괜찮을 환경이 된 관계로 자꾸만 눈에 밟힌달까. 왠지 트랙패드만 있으면 뭔가 완성될 것만 같은 이 기분. 으으으으으.. 아쉽다 아쉬워.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내 옆에 생겨있으리라 희망해 본다.
"누구 맘대로? 정신 차려라???"
다음으로 가지고 싶은 건 소형 무선 마이크. 이미 TX660이라는 유튜브 계에서 유명한 녹음기 하나를 가지고 있긴 한데, 이게 사실 내게 무용하다. 수동으로 영상과 음성을 맞춰야 하는 수작업도 귀찮고.
-뭐 찍고는 있어요?
그게 말이지. 아무것도 안 찍는다.
-근데 마이크가 왜 필요한지?
귀엽게 생겨서?
-진실의 방조차 아까운 사람이로세.
그냥 첫눈에 반했다. 작고 귀엽고 무선에, 비록 아무것도 찍진 않지만 자동으로 영상과 음성의 싱크까지 맞춰주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그 대단함을 내가 느낄 수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보통의 내 지름 패턴이 이렇다. 뜬금없이 뭔가를 보다가 충동적인 구매욕을 느끼기도 하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살까 말까를 반복하며 쟁여놓은 것도 존재한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 대상이 [스포츠카]와 같은 대상이 아닌 점이랄까?
내 소비는 나름 귀엽게 보려면 한없이 귀엽게 볼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것이 내 자존심이다.
-그냥 돈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
값싼 동정은 지양하겠다. 키보드 하나에도 이토록 기뻐할 수 있는 중년이라니. 귀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앞으로도 내 소비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정당화시켜가며 하나하나 제품을 구비해 볼까 한다. 이것은 아내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선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만 손발이 떨리는 걸까?
'나도 참.. 이 나이에 두려움이라니.'
부디 무사한 결혼생활을 빌어주셨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지름 희망이자 꿈일 뿐이다.
"뭐 꿈은 꿀 수 있잖아?"
아내 앞에서 당당해 질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