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걸음
"오늘따라 분량이 적더라?"
글을 읽은 아내가 뜨끔할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 어떻게 알았지?'
"그래? 그래도 그렇게 엄청 적은 건 아니었는데."
"아닌데. 평소보다 많이 짧은데."
대충 읽어준다며 툴툴거렸는데, 생각보다 아내는 이상한 부분에서 뛰어난 감각을 자랑한다.
마치 내가 분량 줄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평소보다 500자 정도 줄어드니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사실은... 조금 줄긴 했어."
"거봐! 맞지? 내가 틀릴 리가 없지."
혹시 모를 다른 조언이 이어질까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입술을 바라봤다.
"♩♪ ♫ "
"⋯⋯."
"♩♫♪ -"
"더 해줄 말은 없어?"
"응? 그게 단데?"
"아니 뭐, 내용이 좀 이상하다거나 혹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거나."
"아냐. 분량이 적다는 거 그거, 그게 다야. 끝."
'뭐야?'
뭐, 이 정도라도 만족해야 하나. 다른 사람은 [분량]에 관해서조차 언급 안 해주니.
"내가 말했잖아. 그냥 좀 당당하게 쓰라고. 뭘 그렇게 맨날 눈치 보고,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소리 따위에 그토록 신경 쓰냔 말이다. 남자가 쪼잔하게 쯧."
성향이 어디 쉽게 변하던가. 그리고 나를 긁으려면 말이다. 이 정도 말로는 부족하지가 않다.
"어 그래! 나 쪼잔하다 쪼잔해! 그러는 당신은 뭐! 잘하는 게 있어!?"
"나? 내가 가장인데? 내가 돈 벌잖아? 어?!"
"아⋯."
"어디 한번 제대로 샅샅이 털어줄까?"
"헤헤. 제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서 그만."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었잖아?
그냥 받아들이자고.
-자아! 오늘은 어디 [글럼프]에 대해 알아볼까요?!
평소 자주 챙겨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 [나비계곡의 웹소설 이야기]를 틀었다.
https://youtu.be/QmedZbDaw7o?si=0mEuIQjuNrUpfhhp
"오늘은 무슨 말로 뼈를 때려주려나?"
자리 잡은 기성 작가의 귀한 뼈 때리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이기에 제대로 맞을 준비를 하고 클릭했다.
문제는 매만 맞는다는 사실. 글은 써지지 않으나 맷집만 늘어간달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 좀만 쉬었다 하지 뭐ㅎㅎ." 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작 150화짜리 노인기 작품 하나 썼던 주제에 비교 대상은 잘 나가는 작가로 두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한데, 옛말에 꿈은 크게 꾸라고 했더랬지, 아마도...
한번 소설 쓰기를 멈추고 나니 영상 속 말처럼 다시 쓰는 게 쉽지만은 않은 거 같다.
말로는 맨날,
"내가 올해 꼭 1질 쓰도록 할게."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이번에는 잘 써볼 테니까."
"어허. 안 쓴다는 게 아니라,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경험 쌓는 중이라니까? (라면서 유튜브 보기)"
아내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에효, 저 인간이 언제 정신 차리려나.'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쓰면서 후회하는 것]이 아닐까?
쓰지도 않으면서 후회만 해봤자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일종의 [죄책감 벗어나기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상 소재나 생각하는 바를 토대로 글을 쓰는 것 또한 분명 수요층이 존재할 글이기 때문에 쓰는 거긴 하지만, 처음 목표는 소설이었으니 [정체성]을 살짝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셀프 디스도 시작해 봤다.
하지만 나란 사람은 까도 까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 타입인 듯, 글을 쓸 때만큼은 "아아, 내가 정신 차리고 해 봐야지."라고 마음먹었다가도, 다 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취미 생활(?)에 스며든다.
이런 와중에 [분량]까지 줄어든다?
양심이 있다면 이건 아니지.
죄책감을 덜어낼 생각이라면 제대로 덜어내 보자.
한편으로는 또 그런 생각이 든다.
역시 소설이라는 건 아무나 못 쓰는 건가?
매년 혹은 꾸준히 작품을 내는 작가들은 대체 어떤 사고회로를 가진 사람이길래, 나와는 다른 걸까?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써낸 글이나 작품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이 대중성을 띄며 호응을 얻어내는 것.
뭐 하나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과정이 없다.
대중성이나 인기는 논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니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아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게 침대에 눕고 싶다.'
골치 아픈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온다.
소설 또한 글의 장르인 만큼 분명 쓰다 보면 써질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근데 그 첫 발을 내딛는 게 너무 괴롭다.
'아직 구상이 덜 돼서... (어차피 구상은 언제까지나 되지 않을 예정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쓰지 않는 이상 늘 경험은 부족할 예정)'
'인물을 만들어 낼 방법을 못 찾아서... (마찬가지로 쓰지 않는 이상 인물도 창조되지 않음)'
'플롯이 없어서... (그럼 소설을 쓰겠다고 얘기하지맛!)'
언제쯤이면 나의 징징이 기질이 사라질는지.
누군가의 40대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시기겠지만,
내 40대는 왜 이렇게 나약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이게 다 중2 때 중2병을 앓지 않아서 40대에 벌을 받게 되어버린 건가?'
일단 오늘도 첫 발을 내딛기는 쉽지 않을 거 같으니 [죄책감]부터 한 스푼 덜고 가실게요.
그리고 [필사]를 하면서 다시 또 한 스푼 더 덜어낼게요.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혹은 소설의 향이라도 나는 무언가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을까?
나의 하루 일상이 비록 자기비판과 혐오로 시작했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이 남편! 헛소리할 시간에 글이나 써재껴!"
"아차차. 일깨워줘서 고마워."
여전히 미숙하고, 부족하고, 안일한 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
아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40대의 무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