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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좋은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200 걸음

by 고성프리맨

이십 대 후반에 [티스토리]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능의 좋고 나쁨, 트렌드를 떠나 신기한 기능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공동 블로그 운영]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와! 이거 우리 한번 해볼래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회사 동료 세 명이 합쳐서 공동 4인 체제로 블로그 개설 완료.

아마 뭐가 됐든, 일보다는 다 재미있었던 게 아닐까?

마치 시험기간만 되면 청소마저도 재밌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호기롭게 채널명은 [네남자이야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작명부터 많이 잘못된 것 같네.


'도대체 네 남자가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길래?'


많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


"자 질문 있는 사람 손‼️"


학창 시절에도 이러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게, 막상 판을 벌이니 아무도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로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 내가 먼저 선빵을 날리마.'


당시 썼던 글을 구할 방법은 없으나, 대충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 보면 중2병 걸린 주인공의 엄근진 스토리였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세상이 왜 나만 억까해! 나만 불행해! 나는 행복할 수가 없어!"라고 보면 되겠다.


꽈찌쭈.jpeg 출처 - 나무위키


쓰면서도 지루했다.

그래도 큰 책임감을 느꼈기에 최소한 블로그의 문 닫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쓴 글이었다.


그렇게 발행한 글은 회사에 친했던 디자이너 누나들만 읽어줬다.


-어머. 이게 뭔 소리니? 깔깔깔.
ㄴ누나. 이거 진지한 얘긴데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ㄴ네 집에 가서 주무세요.

-노잼.
ㄴㅋ


그 뒤로는 완전한 의욕 상실. 더 이상은 글을 쓸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내 사태를 지켜봐서인지 나머지 세명의 마음도 복잡했을 거 같다.


'설마, 글을 이지경으로 썼다고? 세상에.'


그래서일까 아무도 올리지 않았다. 나만 매 맞는 세계관. 쓴 자만 조롱받는 블로그 세상.

억울해. 너희들도 당해봐야 해!

그때부터 엄청난 푸시를 시작했다. 물론 티 안 나게.


"아니 oo님 우리 글 최소한 한 개는 올려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나이 갑빠가 있지."

"전 운동 안 하는데요?"

"평소 가오가이거 ost 좋아하잖아요? 그쵸?"

"연관 짓지 마세요. 아무튼 저도 글 한 개는 올려볼 예정이니까 닦달 노노."


또 다른 사람은 솔직히 그렇게까진 친하지 않아서 대화가 어려웠다.


"저, 저기... 글..."

"아 업무 하는데 방해하지 마십쇼. 지금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진짜."

"......"

"글 올릴 거니까 일이나 해요."


나머지 사람은, 음... 말하기 전에 알아서 올렸네?


결국 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도 글을 발행했다.


'마음껏 비웃어주마.'라며 한껏 조롱할 생각으로 블로그에 접속했다.




"어? 어라?"


재밌네 이거? 이상한데.

내 글 빼고 다 재밌었다. 분명 이럴 리가 없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제일 못 쓰는 거였어?


맞다. 내가 제일 못 쓰는 사람이었던 거다. 디자이너 누나들의 댓글도 내 글에 달린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oo야, 넌 일도 잘하고 어쩜 글도 잘쓰니?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ㄴ누나 저는요?
ㄴㄴ넌 빠져. 알아서 니 돈으로 사 먹으렴.
(참고로 oo는 외모도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엄친아였음)


-ㅁㅁ 글을 읽으니까 오늘 하루도 힘낼 수 있을 거 같아. 글 진짜 재밌게 잘 읽었어 ^^.
ㄴ왜 내 글에는 이런 얘기 안 써줘요?
ㄴㄴ글이나 잘 쓰고 나서 얘기하려무나.
(ㅁㅁ 글은 내가 읽어도 위트가 넘쳐흘렀음. 게다가 술술 읽히기까지.)


-xx, 너의 깊은 취미에 대해 엿볼 수 있던 좋은 시간이었다!
ㄴ나도 한 취미 하는데.
(xx는 사진을 참 잘 찍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이 댓글에는 대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찾아왔다.


"여러분 우리 딱히 폐업식은 계획이 없으니 그냥 잠수탑시다!"

"좋아요 좋아!"


다 같이 짠 듯 깊은 해방감을 느꼈다. 아니지, 다른 사람한텐 물어본 적 없으니 나 혼자만 그렇게 느꼈으려나.


그 뒤로 정확하진 않지만 두 개 정도의 이어지는 글을 더 썼던 거 같다. 그리고 결과는 참혹했다. 처음에는 댓글이라도 달아줬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욕]을 하는 게 아닌가.


지금 와서 얘기하지만 '나 그때 상처 안 받았음.' 딱히 상처는 받지 않았다. 스스로도 충분히 못 쓰고 있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협동 블로그는 막을 내렸다.

영원할 거 같던 회사에서의 야근도 막을 내렸고,

낄낄거리던 우리의 추억도 막을 내렸다.

.

.

.

아침에 눈을 뜨니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내 눈에는 한줄기 눈물자국이 흘러 있었다.

과거 생각 때문이 아니라 다리에 쥐가 나서였으니 감성적이라는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가 글을 써보려고 시도를 해본 적이 있긴 했구나.'


난 역시 참으로 긍정적이다.

못 썼던 글의 내용보다는, 글 써보려던 시도를 했었노라며 아름다운 과거로 미화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누구에게나 잃어버렸던 기억의 순간이 존재한다.

내게도 잃어버렸던 순간이 있었다.


'혹시 지금 글을 쓰는 게 과거의 미련 때문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쭉 썼으면 나름 10년 이상의 글쓰기 습관을 가졌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니.


언젠가 시간이 또 많이 흐른 뒤, 지금의 글들을 보며 과거의 내 모습과 겹쳐 보이는 순간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때는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소한 멈추거나 잠수탈 생각은 이젠 하지 않으니까. 단지 내 글을 읽어줄 분에게 '?'가 떠오를만한 글은 쓰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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