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걸음
'빨리 써야 하는데.'
빨리 쓰고 싶다고 해봤자, 마음먹은 것처럼 막 써지진 않는다. 글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부지런함과 비례하는 듯하면서도, 막상 쓰려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고 자리에 오래 앉아 있고 상상을 많이 해봤자 안 써질 땐 어떻게 해도 써지지 않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강릉]에 갈 일이 생겼다. 아이들 방학 후 특별히 놀러 간 곳도 없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일+피크닉]이 가능할 거 같다. 대신 전제 조건은 글 한편 후딱 쓰기.
-거 뭐 쓰든 안 쓰든 돈벌이도 안 되는 거 가지고 유난은. 갔다 와서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렇긴 한데, 성격상 전처리를 해야 마음이 후련해진달까.
평소 [매도 먼저 맞자!]란 생각이 있다 보니 살면서 무던히도 선빵을 맞으며 살아왔었다.
그런 이상한 습성이 남아버려서 이제는 몸이 저절로 반응하게 되어버렸다.
마치 아침에 화장실에서 해결을 못하고 나왔을 때의 찝찝함처럼 느껴진달까.
이렇게 비유했다 해서 내가 글을 배설하듯 쓴다고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왠지 뜨끔하긴 하네.)
'꼭 해내야 해.'
혹은,
'잘해야 해.'
라거나,
'반드시 끝내자.'
라는 식으로 마음먹은 날엔 제대로 일이 안 풀렸던 거 같다. 노래 부를 때도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부르다간 오히려 소리도 잘 안 나고 박자도 놓치며 엉망진창으로 부르게 되는 것과 비슷하려나. 너무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화'를 불러온다.
그래서 마음을 살짝 비웠다.
'대충 써도 좋으니 마음 가는 대로 쓰자.'
-대충? 아니 그 말이 곧 배설 아닌가요?
사전적 정의로서 [대충]의 뜻을 대충 찾아봤다.
범위나 정도가 대강 미치거나 이뤄지는 정도로.
음. 뭔가 사전적 의미를 찾으면 빠져나갈 구석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정정하겠다.
'마음 가는 대로 편히 쓰자.'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약점 잡힐 구실을 하나 제거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여기서 늘 등장하던 그 패턴‼️
'이 정도 쓰니 [1,000자]가 되었습니다. 헤헤헤헤.'
역시나 잘 안 써질 땐 애먼 분량만 주야장천 확인해 보는 거 같다. 글자 수 세기 대신 잘 쓰려고 노력하면 더 좋으련만.
'오늘 글을 어떤 카테고리에 포함시키면 좋으려나.'
보통은 [40대도 특별하진 않아요]라고 이름 붙인 매거진에 글을 포함시키곤 한다. 딱히 40대의 일상과 무관한 일조차도 어떻게든 엮어서 포함시켜 버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써온 글 중 많은 양이 해당 카테고리에 속해버렸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거나, 세분화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그 안에서도 이리저리 가지치기를 해서 글을 나눠놨을 텐데 그럴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않다.
'그래도 기왕이면 40대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라도 들어가면 좋지 않겠어?'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40대 남자로서 느낀 특별한 순간이 있으려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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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잠시 웹서핑을 했다.
오랜만에 손흥민이 골을 넣었다.
역시 팀은 졌구나. 상관없어. 난 팀이 아니라 손형님을 응원하는 중이니까.
골장면만 움짤로 만들어놓은 영상을 수십 번 확인 후 댓글을 읽었다.
역시나 활기차지만 영양가 없는 댓글잔치가 벌여져 있었다.
오늘도 애들은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익숙하게 태블릿을 켜고 게임 삼매경으로 산뜻한 하루를 시작 중이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8시가 되어가고 있는 중.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 무거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해도 이상하리만치 몸은 똑같이 천근만근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혹시라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나의 평화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간 지 3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큰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빨리 나오라 재촉한다.
나는 가볍게 무시하며 '5분만 기다려 줘.'라고 말했다.
아이는 못 기다리겠다며 앵앵거렸다.
그 소리에 잠이 깬 아내도 아이 편을 들며 "당장 화장실에서 안 나와?!"라고 윽박을 질렀다.
모자협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문을 열뻔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내 갈길을 가기로 마음먹고는 아이에게 말한 [5분]을 끝내 다 채우고서야 굳게 걸어 잠긴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는 왜 이제야 열어주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내며 황급히 바지를 내리고⎯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냉장고문을 열었다.
비록 백수를 자처하는 삶이지만 어울리지 않게 남은 [그릭 요거트]에 눈이 갔다.
이래 봬도 아무 요거트나 먹지 않는다.
냉동 블루베리를 한주먹 조금 안되게 그릇에 담아내고, 그 위에 대충 그릭 요거트를 퍼 담았다.
아내는 혼자만 먹냐며 노기를 띤 눈으로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요거트를 싹싹 긁어먹은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몬드를 10알 집었다.
까드득-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 느낌이 좋아 남은 아몬드까지 마저 다 해치웠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와 머리감기를 하고 커피를 한잔 내렸다.
그 뒤엔, 노트북을 켜고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빈 여백을 채우는 중이다.
.
.
.
'쓰고 보니 40대가 아니어도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래서 카테고리 제목을 [40대도 특별하진 않아요]라고 지은 거였다.
언제나 특별한 일은 가물에 콩 나듯 생기는 관계로, 애당초 특별함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쓴다. 글을.
-말투가 왜 그러죠?
내가 좋아하는 [왈도체]라서 그렇다. 요즘은 [팀왈도]라 해서 해외게임의 한글 번역에 힘쓰고 있는 그룹도 있는 거 같다.
https://namu.wiki/w/%EC%99%88%EB%8F%84%EC%B2%B4
혹시라도 궁금해할 분이 있을지 몰라 링크도 첨부해 본다.
혹여나 내 글을 읽고 영양가 없는 이상한 아침을 먹은 기분이 들었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셨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런 결이 내 글의 방향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쓰겠다. 글을.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발전하길 바라며, 조용히 퇴장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