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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먼 훗날에 다시 읽기로 약속

203 걸음

by 고성프리맨

"아빠! 학교에서 자꾸 이상한 메뉴가 나와요. 뭔지 알아요?"

"뭔데?"

"김치 미역국!"

"...? 거짓말."


그런 메뉴가 있다고? 단 한 번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근본 없어 보이는 음식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며 (이때 단정 지어서는 안 됐다.) 검색을 해봤다.


[출처] https://www.10000recipe.com/recipe/6956203#google_vignette


'세상에 진짜 있다고!?'


하긴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니 조합으로만 놓고 보면 충분히 만들 수 있긴 하겠구나. 그래도 생소하다.


"선생님한테 가서, 이게 뭐예요? 하니까. 김! 치! 미~역~국!이라고 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꺄르륵."


아이가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상황설명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을 포착한 아이는 끝없는 뇌절을 시작했다.


"김치미역국!"

"크하핫!"

"김치미역-"

"꺄하하!"

"김치미-"

"우하하!"

"김치-"

"그만..."


아무리 개그의 묘미가 [반복]이라 해도 이건 너무 뇌절이 심하잖아? 그런데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아 자존심 상해.'




요즘 확실히 물가가 많이 오르긴 했다. 그 여파로 인해 [외식의 빈도]가 굉장히 줄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이 줄어든 탓도 있다.


"뭐 먹고 싶어?"라고 아내가 물어보면 예전엔 바로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는데,

이제는 "글쎄?"라며 한참을 고민해 봐도 뭔가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집에서 해 먹을까?"

"......"


딱히 외식하고 싶은 건 아닌데도 집밥 먹자는 얘기에도 시큰둥해하자 아내가 째려보는 게 아닌가?


"아니 사 먹는 것도 얘길 안 하고, 해준다도 싫다고 하고 어쩌라는 거야?"

"그러게."


'뭐지? 왜 이렇게 먹고 싶은 게 안 떠오르는 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했다.


"아 또 뭐 하려고? 나 분명 말했다. 난 밥 해 먹고 싶다고 했어. 이상한 요리 만들지 말고."

"걱정 노노."


요리의 정령이 나를 부르기라도 하는 듯, 나도 모르게 이끌림에 의해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었다.

짜잔.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는 늘 먹던 맛. 김치참치볶음밥(에 계란프라이를 곁들인)이 탄생했다.


"휴... 또 저거 만들 줄 알았어. 어떻게 요리 원툴이냐? 난 이거 안 먹어."

"양이 많은데. 나 손이 큰 거 알잖아."

"아오 진짜! 맨날 이것만 만들잖아 지겨워 죽겠네."


툴툴대면서도 결국 내가 만든 밥에 숟가락은 얹은 그녀가 우물우물거리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흥. 맛은 있네."




[브랜든 올만이에요.]


부끄럽지만 영어 이름은 브랜든이다.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지만 꼴에 영어 이름은 가지고 있다. 마음만큼은 이미 미국인인듯하다.


[하이 제니퍼. 요즘 어때요?]


하하. 설상가상. 내 주변인도 대부분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끼린 부끄럽지 않지만 아마 주변에서 누군가가 살펴본다면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 될지도 모르겠다.


제니퍼는 디자이너였다. 지금도 그림을 통해 자아실현 및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 중인 멋진 사람인데, 이번에 캘린더 및 굿즈를 제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선물을 보내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https://blog.naver.com/kdww1203/221898557887


새해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잊지 않고 연락을 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선물까지 보내주다니. 그녀는 천사임에 분명하다.


"지금 외간 여자랑 대화 나눔?"

"당신도 알잖아 제니퍼야 제니퍼."

"제니퍼건 제니건 외간 여자 아니야! 당근에 나눔 하고 싶다 진짜."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걱정이라도 할지 모를 제니퍼. (MSG가 잔뜩 첨가된 거니 전혀 걱정 안 해도 됩니다요.)

.

.

.

대화를 나눈 지 하루가 지났으려나?


택배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벌써?!'


한국은 역시 대단한 나라다. 아무리 깊은 곳에 틀어박혀 살아도 택배가 바로바로 도착한다.

선물은 포장부터 너무나 이뻤다.

월마다 삽화로 쓰인 그림도 어찌나 감성을 자극하던지. 코끝이 찡해졌다.


[잘 받았어요. 새해 복 많이 받고, 우리 기회 만들어서 대화 나눠요.]


영포티스럽게 DM으로 굳이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미 카톡 친구면서.)




일상의 순간은 머릿속에서 사진처럼 잠깐 찍혔다 사라지곤 한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기엔 뇌용량이 아까울 수 있으니, 휘발되는 기억을 굳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가끔은 큰 이유 없이 그런 순간을 써보고 싶은 날이 있다.


지금 보기엔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일지 몰라도,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때를 되돌아본다면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손가락의 힘을 빌어 타자로 쳐봤다. 그렇게 오늘의 글이 써졌고, 비로소 나는 오롯이 하루의 시작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의 안도감과 달리 거실에서는 아이들이 게임하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평화와 아이들의 평화는 반비례라도 하는 것일까? 이놈의 집구석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


그래도 잠시, 조금만 더, 일상의 평온함을 느끼고 아이들을 달래러 나가봐야겠다. 그것이 아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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