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걸음
아이들이 방학하고 나니 집에서 주로 [게임]을 한다.
"게임 좀 그만해! 다른 것도 좀 하고 해야지!"
게임 속에 파묻혀버린 아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내의 갈(喝),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한다.
"오빠도 옆에서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좀 해봐. 이게 맞아?"
문득 아이 또래였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아침 8시 기상.
아침밥을 허겁지겁 챙겨 먹은 후, TV 시청.
지루해지면 게임기 연결 후 게임 스타트.
할머니가 차려준 점심 식사.
소화 겸, 동네 오락실로 직행.
저녁 5시 정도까지 오락실 죽돌이로 구경 및 참견.
귀가 후 저녁 식사.
...
'내가 애들을 뭐라고 할 게 아니네.'
[콩콩팥팥]이라던가. 내 유전자가 그대로 전승된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아니... 아빠가 돼서는 왜 한 마디도 안 하고!"
잠시 과거 회상에 빠져 있느라 아내의 말을 다 챙겨 듣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도 계속 내 귀에다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 같다.
"으음."
"아니 왜? 뭐가 또 불편해?"
"그게 아니라 귀 좀 가까이."
아내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귀를 내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나는 소곤거리며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힘주어 얘기했다.
"나도 똑같았어."
"뭐?"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고."
"......"
안타깝지만 사실인 걸.
아내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게 아닌가.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랬던 거 같아. 하루 TV 시청시간 10시간 넘고 그랬었어."
"허?"
역시 콩심은 데 콩이 나는 건 자연의 섭리인가 보구나.
그래도 아이가 방치되어 노는 행태를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잘 해먹이자.'
놀 때 놀더라도 밥은 먹고 놀으렴.
최근 식사 메뉴를 떠올려봤다.
주로 토스트, 볶음밥, 파스타, 라면과 같은 [간단식]이 순위권에 위치해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 엄마가 탕수육도 만들어주고, 감자크로켓도 해주고, 아침도 육첩반상이고 그랬는데... 난 나쁜 엄만가 봐."
"아니 뭐 반찬 수 적다고 나쁜 엄마는 아니지. 내가 좀 더 신경 써서 밥 해볼게."
"오빠도 맨날 만드는 게 거기서 거기잖아. 찌개 끓이거나 위에 언급한 음식 만드는 게 전부면서."
반박은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이래 봤자 그 범위가 정말 협소하다. 물론 아이 입맛의 권위자답게 맛있게 먹게는 만들 수 있긴 한데, 그렇다 해서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데엔 한계를 느끼는 중이다.
AM 07:30.
눈이 번쩍 떠졌다. 정확하게는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가 맞을 듯.
오늘 만들기로 한 아침 메뉴는 얼추 정해져 있었다. 얼마 전 마트에서 구매했던 [유부]를 활용해 유부초밥을 만들면 끝.
'음... 조금 더 색다른 유부초밥을 해줄 순 없을까?'
쿨쿨 자고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머리를 굴려봐야 할 때야.'
그러자 내 눈에 몇 가지 재료가 눈에 들어왔다.
스팸 1팩, 쉬어빠진 김치, 찰지게 만드려다 실패한 고슬 거리는 찬밥. 추가적으로 양파나 기타 채소류도 있을까 싶어 뒤져봤지만, 아내의 알 수 없는 정리 알고리듬을 탄 냉장고에서 내가 찾을 길은 없었다.
'이것은 도전이다.'
일단 흔해빠졌지만 웬만해서 실패란 없는 [김치스팸볶음밥]을 만들었다. 자주 먹는 음식이라 특별함은 없지만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을 메뉴다.
문제는 유부초밥 키트에서 제공되는 [단촛물]을 넣느냐 마느냐인데,
사실 안 넣는 게 덜 도전적이긴 할 거 같았지만 기왕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기로 했으니 과감히 투하!
혹시 몰라 망칠 때를 대비해 김치볶음밥의 반만 단촛물의 제물로 삼았다.
쓱- 스윽- 밥을 비비고 맛을 살짝 봤다.
"아니 이 맛은!?"
너무나 새콤해. 이대로 나의 김치볶음밥은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하지만 이대로 실패의 기록을 남기기엔 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심기일전해서 유부에 밥을 넣어서 다시 한번 시식해 봤다.
"우마이! 아, 아니 하오츠!?"
한국어 빼고 모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준이니 이 글을 읽고 굳이 같은 메뉴 만들기에 도전하는 건 비추하겠다.
흥분은 덤이었다.
'아침부터 이런 훌륭한 메뉴를 만들어 낸 나 자신을 칭찬해.'
부푼 마음으로 품평회를 열었다.
큰 아이 한입, 작은 아이 한입, 다음으로 아내 한입.
반짝거리는 눈빛의 나와 달리 가족의 평은 냉정했다.
맛이 없진 않으나, 그렇다고 인생 음식으로 기억될 정도도 아니라는 평가.
'이게 맞지.'
맞기는 한데 살짝 서운하달까?
"왜? 기대만큼 호평이 안 나와서 속상해?"
"아니 뭐 내가 애도 아니고."
아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나의 서운함을 눈치채버렸구나.
.
.
.
뒷얘기가 있다.
사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본 건 개인적인 만족감을 위해서였다. 물론 결과물이 좋게 나와 "맛있어!"란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최악." "맛없어." "다신 하지 말아요."
와 같은 말은 듣지 않았으니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문득 내가 만든 [김치스팸볶음유부초밥]을 바라보며, '내 글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현실에서의 평가는 다른 법이다.
이렇듯 아침메뉴 하나를 만들면서도 인생을 배우는구나 싶다.
억지 아니냐고?
흠, 으흠, 크흠. 어떻게 알았죠?
마무리를 위한 빌드업 또한 살짝 진부했나 싶지만 오늘은 이렇게 끝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