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시간 18
'어떤 움직임이나 모양을 흉내 내는 짓'을 가리켜 시늉이라 한다.
가령,
'글 쓰는 사람을 따라 하고 싶어.'
'성공한 사람처럼 행동해보고 싶어.'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일은 능동적이야.'
마치 무엇이라도 이룬 것처럼 따라 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아직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혹은 쌓여있다고 착각 중일수도 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부족하게만 느껴지는지.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음을 아쉬워만 하기엔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필사를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러 작품을 필사하진 않고 오로지 한 작품만 계속해서 따라 쓰고 있다.
평균 5 - 7천 자 분량이다 보니 치다 보면 생각보다 손목과 어깨가 아프다.
최근엔 너무 치기 싫어서 긴 글의 경우 반으로 쪼개어 이틀에 걸쳐 써보기도 했다.
필사 후 마지막엔 간략한 소감을 남긴다.
처음 필사 소감과 달리 날이 갈수록 간소화되더니 최근엔 한줄평스러워졌다.
그래도 최소한의 감상 정도는 남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효용성을 떠나 간직하는 용도로 활용 중이다.
'타인의 글을 그대로 따라 쓰는 일이 과연 도움이 되는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은 제대로 못하겠다.
어떤 날인가엔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가도,
또 다른 날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싶기도 하다.
심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관계로 스스로의 비위를 맞추는 일조차도 쉽지가 않다.
필사에 들어가는 시간은 타이핑 속도에 달렸다.
그래도 평균치를 내보자면 3-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타이핑 속도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줄어든 탓도 있을 테고,
힐끗힐끗 보면서 치다 보니 그냥 읽는 것에 비해 시간도 많이 들 수밖엔 없다.
이미 한번 읽었던 글을 따라 치는 상황이라 놓쳤던 부분을 발견할 때가 더러 있다.
'이런 내용이 숨어 있었던가?'
사실 숨어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놓쳤거나 까먹었던 내용일 뿐이다.
그래도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 내용이 있어서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서 N회차 관람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필사를 하다 보면 작가의 상태에 대해 상상해 보게 된다.
'이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오늘 회차엔 맞춤법 교정이 안 된 곳이 꽤나 많네. 교정할 틈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봐.'
'어떻게 이런 생각을 떠올렸을까? 게다가 이 미친 분량?!'
'오늘은 분량이 짧네. 쥐어 짜내느라 고생한 흔적이 보여.'
정확히 알 수도 없고 굳이 알아야 될 습관도 아니건만 작가의 글 쓰는 습관과 관련된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불경 같은 걸 이런 식으로 전부 필사해서 가져왔으려나?'
과거에도 필사를 하는 이가 있었겠지.
목적은 다르더라도 필경 그만의 고충이 있었을 거다.
시절이 좋아져서 집안에 앉아 키보드로만 필사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음에 대한 감사함이 문득 생겼다.
전생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혹시... 나 이전에도 필사하며 살았던 게 아닐까?'
혹은
'필사만 하다가 생을 다한 건 아니겠지?'
애써 고개를 강하게 좌우로 저었다.
비록 필사 밖엔(필사 만이라도) 할 수 없는 처지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은 차곡차곡 따라 하며 내 안에 내재된 욕망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쓰고 싶어 져서 분출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정제되고 수려해진 문체로 담아내기 위한 수련의 기간이다.'라고 생각하자.
'수려...? 음. 수려는 빼자.'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분량이 제자리걸음이다.
어떤 날엔 별로 쓴 것도 없어 보이는데 쉬이 삼천자를 넘을 때도 있었다면,
오늘은 저주받은 날에 가깝다.
오히려 대충 쓰는 것보다 이것저것 생각해 가며 쓸 때 진도가 더 안 나간다.
미리 겁먹고 하나 얘기해 보자면.
-이 정도가 생각해서 쓴 글이라고요?
"사유의 역치가 낮은 편인가 봅니다."라고 답하도록 하겠다.
사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기도 하다.
단점이 있을 때도 있다.
팔랑귀인 관계로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네."
라며 줏대라는 게 없어진다.
그런 면에선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오롯이 나만의 생각은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혹은 시늉 중인 건 아닐까?'
이러저러한 고민이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고민을 글로 옮겼다.
나로서는 명쾌히 답을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하루의 고민이란 보통 이런 식이다.
거창하게 한국과 나아가 세계의 평화 같은 목표의식 같은 건 없다.
여전히 나에게서 시작해 나로 끝나버리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해답을 알고 싶어서 글로 남기는 게 전부다.
비록 지금은 모르지만 후일엔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때 가선 지금 궁금해하는 것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때까진 시늉이라도 하며 어떻게든 버텨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