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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만나면 지평좌표계 어쩌구 하지 않기

그냥 써 보는 이야기 23

by 고성프리맨

딱히 무서운 얘기는 아닙니다.




"으아아아아악!"


별로 놀래킨 것도 없는데 오늘은 날 보자마자 그대로 까무러쳤다.

분장에 톡톡히 신경 쓴 효과가 빛을 발하는구나.


"어이 김 씨! 꽤 하잖아?"

"에헤헤. 오늘은 좀 쉬웠네요. 그냥 보자마자 심정지를 일으켜버렸네요."

"부럽다 부러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잘 나가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겁도 없어서 웬만해선 놀래지도 않아. 이번 달 실적도 형편없는데 큰일이야."

"에이 잘하시잖아요. 저야 이제 이 일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요 뭘."


띠리리리링-

콜이 울렸다.

우리에겐 물리적인 휴대전화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콜이 울리면 실적을 올릴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나 가봐야겠어. 담에 보자고 김 씨!"

"네 살펴가세요 파이팅!"


그나저나 내 이름은 김 씨가 아닌데 저 양반은 맨날 김 씨라고 부르는 건지.

뭐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할당량도 채웠겠다. 지금부터 다음 콜까지는 여유가 생겼다.


'오늘까지 하면 벌써 10명째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명 한 명 사람을 쓰러트릴 때마다 스탬프북 같은 게 눈앞에 떠오른다.

모아야 되는 총스탬프의 수는 100개.

오늘도 한 명을 해치운 관계로 눈앞에는 스탬프북이 시각화되어 두둥실 떠올랐다.


-10장! 10장을 모았습니다. 10장을 모은 기념으로 쿠폰을 발행해 드립니다. 유용하게 써주십시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방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귀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인지된다고 해야 맞으려나?

어찌 됐건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해야겠다.

내 앞에 심정지로 쓰러진 이 사람은... 안 됐지만 인간계의 절차대로 장례를 치르게 되겠지.

.

.

.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었다.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알람이 울렸고, 타깃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게 아닌가.


-제한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해 주십시오. 행운을 빌겠습니다.


"어이! 이게 뭐냐고? 설명 좀 해줘 봐."


일방적으로 들린 음성은 불친절하게 자기 할 말만 하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뇌리에 각인된 '인간'을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것.


'대체 뭐 때문에 내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데?'


이런저런 생각할 여유도 없이 첫 번째 타깃과 마주쳤다.


"뭐, 뭐야! 씨... 으.. 으힉?! 바, 발이 없어!!!"

"@@#$@#%$(저기요. 제가 보이세요?)"

"아아악 내 귀! 사, 사람 살려요! 내 눈앞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귀... 귀..."

"@#$@#$(저... 대화를 하고 싶은데)"


몇 발자국 다가서자 남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급기야 흰자위를 보이고는 뒤로 쓰러져 버렸다.


"아."


내가 그의 몸에 손을 대자 만져지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이게 무슨..."


잡아주려던 내 손을 통과하며 쓰러진 남자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뒤에서 빠알간 액체가 흘러나왔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내게 일어난 이 일이 무슨 일인지 정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려 할수록 어지럽기만 할 뿐 아무런 정리가 되질 않았다.

마치 지적 능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몸이 덜덜 떨렸다.


'내가 사람을 죽인... 거야?'


엄밀히 따지면 내가 직접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내 눈앞에 저 사람이 나타나 혼자 놀래서 뒤로 넘어져서 머리가 깨진 게 다 아닌가. 그런데도 몸이 덜덜 떨리는 걸 봐선 아무래도 죽음의 원인이 내게도 존재하는 건 아닌가 싶다.


-축하합니다! 첫 번째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그때 눈앞에 폭죽이 팡팡 터지며 음성이 들려왔고, 스탬프북이 촤라락 펼쳐졌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큰 도장이 쾅하고 첫 장에 박히는 게 아닌가.




-다들 모여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림 드립니다. 전역자가 생겼으니 다 같이 축하해 주러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지 않는다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디서 협박질이야! 안 그래 김 씨?"


이 인간은...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언제 또 나타난 거야.


"아하하... 벌써 세 번째 전역자네요."

"뭔 짓거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김 씨가 나보다는 더 빨리 전역하겠어. 부럽다."

"왜요? 전역하면 좋은 거래요?"

"나야 모르지. 근데 이 짓거리 그만둬도 되는 거 아니겠어?"


'더 이상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죽도록 방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멍 때리며 걷다 보니, 아차차 난 발이 없었지. 둥실둥실 떠다니다 보니 다 같이 모여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내게 '김 씨, 김 씨'거리는 무명 씨의 목소리 외엔 들리지 않는다는 것.

정확하게는 모두가 모여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지 모여 있는 게 보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자. 이곳에 입소한 지 정확히 19년 11개월 만이군요.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지금부터 간략하게 그의 활동사항을 읊어드릴 테니⎯⎯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침내 지루한 연설이 끝났다.

몇 번의 전역식을 봤지만 이번에도 주인공의 얼굴엔 긴장과 환희가 공존해 있었다.

아무래도 낯선 세계로 떠나야만 하는 그의 진실된 표정이리라.


-마지막으로 소감 한 말씀하십시오.


"아⎯ 자, 잘 들리시나요?"

"......"

"잘 들리는 거로 알고, 다들 파이팅입니다. 여, 열심히 하면 저처럼 이런 날이 찾아올 테니 히, 힘내시고. 그,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 뭐였, 아 기억이 그게.. 아 맞다! 으응? 뭐, 였지.. 그러니까 다들 힘을 내시는데 그러니까... 어엉? 넌 내가 처음 만났던 아니 당신이 여기 왜. 아무도 없나요? 어라... 내가 왜 여기, 있나요? 여기가 어디에.."


갑자기 횡설수설하던 그의 몸에서 빛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며 공중에서 회색 잿가루 같은 것이 날렸다.


-하. 하. 하. 한 말씀만 하라고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나 봅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 다들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오늘 전역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음속에서 '대체 이게 무슨...'이라는 의문이 솟구치려 하는 순간 알림이 떴다.


"어이 김 씨. 나 먼저 가볼게 다음에 봐."

"저도 알람이 떴어요. 다음에 봬요."


생각할 틈은 역시나 주어지지 않았다.


'뭐 어때. 일부터 해치우고 좀 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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