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아버지와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댁으로 왔다. 오랜만에 들른 할아버지 댁은 여전히 여유로운 느낌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있던 밤나무도 보인다.
”승호 왔구나.”
”안녕하세요 할머니. 죄송해요 자주 연락드린다고 해놓고선..”
”괜찮아. 바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애비도 왔구나. 밥은 먹었니?”
”네 어머니. 아버지는 어떠세요?”
”며칠 안에 떠나실 거 같구나.. 이 정도면 천수를 누리셨지. 떠날 준비를 조금씩 해오셨단다. 음식을 드시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구나. 인사드리러 가야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날 이뻐하셨다. 항상 웃으며 같은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떠나실 거라 생각하니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여보. 애들 왔어요. 잘 못 알아보실 게야. 눈도 침침해지셔서.”
할아버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셨다. 몸도 말라지시고 몇 달 전에 뵀을 때보다도 더 말라지셨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앙상해진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얇아진 손목과 앙상하게 가죽만 남은 손등이 눈에 들어온다. 손등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거뭇거뭇한 자국들이 보인다. 힘이 없으신 상태에서도 손자를 알아보시는 건지 살짝 내 손을 어루만지시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할아버지 방을 나와 서재로 이동했다. 슬픈 눈빛의 할아버지를 마주하고 있으니 죄스러운 마음이 너무 커졌다. 할머니는 방 안에서 아버지와 나눌 얘기가 있으시다 하셨다. 할아버지의 서재. 어렸을 때는 책장에 꽂혀 있는 여러 가지 책을 꺼내 조금씩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문으로 돼서 읽기도 힘든 오래된 책부터 장편소설까지 할아버지는 늘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눈으로 훑어보다 보랏빛 표지의 앨범을 발견했다. 책을 읽을 기분은 아니었는데 그냥 편하게 볼 수 있을 거 같아 앨범을 펼쳤다. 앨범 속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 사진을 훑어보던 중 할아버지 옆에 여자와 소녀가 같이 찍은 사진을 봤다.
’누굴까 이 분은? 할아버지 하고 좀 닮았는데..’
할머니는 분명 아니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덮개를 살짝 열어 사진을 꺼내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의 뒤를 살펴봤는데 메모가 되어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동생 설애. 그리고 홍심.’
’홍심..?’
꿈에서 나타났던 여자의 이름이다. 우연이겠지. 설애는 누굴까? 할아버지한테 설애라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혹시나 다른 사진이 있을까 싶어 페이지를 넘겨 봤다. 하지만 더 이상 설애와 홍심의 사진이 찍힌 다른 사진은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오신다.
”아빠..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구나. 아버지가 저렇게 있는 모습을 보니 힘드네.”
”힘내세요.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래.. 잘 보내드려야겠지.”
”저.. 아빠? 혹시 설애라는 분 아세요? 그리고 홍심이라는 분도요.”
”홍심? 처음 듣는구나. 그리고 설애 고모 말이냐? 어떻게 알았니? 얘기한 적이 없을 텐데.”
꺼내온 사진을 보여드린다.
”앨범을 살펴보던 중에 신경이 쓰이는 사진이 있어서 꺼냈는데 뒤에 메모가 쓰여 있더라고요.”
아빠는 유심히 사진을 살펴보신다.
”설애 고모에 대한 건 나도 몇 번 듣진 않았어. 그리고 얼굴을 본 적도 없단다. 네 할아버지한테 고모는 아픔이야.”
아버지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들은 고모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고모할머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했다. 행방불명이 되기 전에 뚜렷한 증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물어보고 싶은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고모할머니의 행방불명 후 할아버지는 후회 속에서 살아오셨고 평생 동안 찾기 위해 애쓰셨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지금 까지 고모할머니의 소식은 전해 듣지 못하게 되셨다.
”승호 애비야!!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려나 보구나. 빨리 오너라.”
할머니가 다급하게 아빠를 찾으신다. 슬픔을 참아가며 울지 않기 위해 참고 계시는 게 느껴진다. 아빠와 난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디를 보는지 모르겠는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계신다. 허공으로 손을 들으려고 하는데 힘이 없으신지 바닥에서 움찔거리고 있으셨다.
”아빠.. 할아버지 손 좀 도와주세요.”
뒤늦게 발견한 아빠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손을 들어드렸다. 할아버지는 누군가가 보인다는 듯 손을 잡으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꺼어억.”
할아버지의 입에서 큰 트림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몸이 축 늘어지면서 눈이 감기셨다.
”여보!! 여보! 아이고.. 떠나셨구나. 결국 가셨어.”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목 놓아 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