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걸음
더 이상 070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이다.
추가적으로 010으로 시작하더라도 스팸으로 분류되는 전화는 당연히 거절한다.
설령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어 의혹을 품은 채 받은 전화일 경우, 초반 멘트에 따라선 바로 끊는 편이다.
"고객님⎯."
끊었다.
"고. 성. 프. 리. 맨님 되실까요?"
이번엔 좀 아리송하네. 조금만 더 들어볼까.
"바쁘실 텐데 용건만 빠르게 하나 전달드려도 괜찮을까요?"
또 끊었다.
예전엔 상대의 말을 끊는 게 괜히 미안해서, "저, 제가 지금 바빠서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다음에 통화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많이 했었다.
'그런데 내가 왜 죄송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어느 순간 들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 막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바로 탁- 하고 끊는다는 게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하지만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다음부턴 익숙해져서 상대의 목소리톤과 첫마디만 듣고 바로바로 끊는 스킬을 습득하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회사를 관두고 나서부터는 사적인 대화로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극히 드문데, 오히려 스팸 전화라도 오는 게 다행 아닐까 싶기도 하다만, 굳이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빠르게 전화 끊기의 달인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죄책감이 그리 길게 유지되진 않아서 다행이다)
왠지 전화를 끊고 나면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굳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 혹은 그녀가 하루 종일 전화를 걸면서 받을 수모(?)를 생각하니 짠한 게 아닌가.
'만약 내가 상담원으로 일을 했다면 걸려오는 스팸 전화에도 공손히 응대할 수 있었으려나?'
일은 일이고 사는 사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가 거는 건 괜찮아도 남이 내게 거는 건 어림도 없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죄책감을 느끼는 건 '가짜 죄책감'이 분명해.
사회적인 가면. 사람 좋아 보이고 선량해 보이는 느낌을 챙기고 싶은 자기만족.
그뿐이다.
사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인가 전화를 받으면서 쩔쩔 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기... 제가요... 지금 많이 바쁜.. 아, 네에. 얼마나 더 걸릴까요? 아, 진짜 바쁘긴 한데..."
"뭐 해? 안 끊음?"
"아니. 저..."
대신 끊어줬다.
!!!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대신 끊어줬잖아. 계속 받을 생각이었어?"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갑자기 확 끊으면 기분이 나빠질 텐데. 아 모르겠다. 아이 몰라!"
나한테는 그토록 맺고 끊음이 확실하더니 일면식도 없는 상담원한텐 왜 이리 쩔쩔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을 닮아 있었다.
"오빠는 이런 전화 걸려오면 그냥 끊어? 지금처럼?"
"응."
"아... 나도 끊고 싶긴 한데 왠지 바로 끊기가 좀 미안해서. 아니지. 생각해 보면 이거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게 아니잖아 그치? 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했대?"
"그거야 개인정보가 다 팔렸으니까 그렇겠지 뭐. 나도 당신이랑 비슷했어. 그런데 한번 그냥 끊기 시작하다 보니까 이젠 잘 끊게 된 것뿐이야. 어차피 피차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나쁜 소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해."
나의 개인레슨 덕에 이제는 아내도 칼같이 스팸전화를 잘 끊을 수 있게 됐다.
심지어 나보다도 손속은 훨씬 빨라서 마치 무림고수 같은 풍모를 풍긴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제가 상담원 여러분을 미워하는 건 절대 아니랍니다. 단지 TPO(Time, Place, Occasion)가 맞지 않았달까요."
-백수면서 Time 만큼은 여유롭지 않아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백수의 시간은 일반인의 시간보다 몇 배는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다)
그런데 이건 정말이다. 뭘 그렇게 바쁘게 안 하는 거 같은데도 시간을 볼 때마다 [아침->점심->저녁->어느새 침대] 루틴이다. 그러니까 T가 충분하지 않다.
애석한 점은, 앞으로도 계속 TPO가 잘 맞지는 않을 거 같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용건을 다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 내 행동을 너무 밉게 보지 않으셨으면 한다.
솔직히 상담사분도 스팸 전화받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사실 이게 다 아침부터 스팸 전화를 받아버리는 바람에 시작된 글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자랑하던 바로 끊기를 바로 써먹지도 못했다.
왠지 오랜만에 스팸 전화를 받으니까 바로 끊지도 못하고, 하필이면 "죄송하지만."을 붙여버렸다.
휴,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