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특성상 약간의 비속어가 있음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소영. 이제 나도 널 잊을 수 있어. 넌 참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있었어. 넌 모르겠지만 늘 내 마음속 한편에 네가 있었어. 고마웠어. 이젠 널 보낼 수 있게 돼 나도 참 후련하다. 잘 가 윤소영 많이 사랑했었고 고마웠어.
소영이와 난 중학교 동창이지만 친하진 않았다. 그냥 어느 반에나 있을 법한 조용한 여자 1, 조용한 남자 1이었다. 그 애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네가 같아 꽤나 자주 마주쳤던 기억은 난다. 긴 검정머리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 얼굴에는 약간의 여드름이 있었지만 착해 보이는 느낌이 뿜어져 나오는 여자아이였다. 사실 우린 학원도 같이 다녔었다. 내 기억으로는 수학 단과반이었던 거 같은데 당시 수학 점수가 떨어져서 고민 중이던 내가 부모님을 졸라 겨우 허락을 받아내 다녔던 곳이다. 소영이는 공부를 곧 잘하는 편이었는데 항상 학원에서도 앞자리에 앉았다.
”야! 경남. 오늘 뭐 하냐?”
”공부해야지.”
”아 병신. 게임할 거냐고.”
”PC방 가자고?”
”응. 알면서 꼭 이래. 근데 누구 보고 있던 거야.”
”아냐. 그냥 멍 때린 거야.”
내 시선을 따라서 앞을 쭉 살펴보더니 친구 녀석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쟤 좋아하냐?”
”뭘?”
”맞네. 이 새끼 그러려고 학원 왔네.”
”아냐 병신아!”
”안 하던 욕까지 하고 지랄이야. 괜히 쪽팔리니까. 뭐 좋아하는 애 있으면 가서 말 걸어. 뭐 어때. 어차피 까일 텐데.”
”아 진짜! 이따 같이 안 간다?”
”웃기고 있네. 내가 너랑 놀아주는 거야. 뭐래.”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친구가 이상한 얘기를 한바탕 하고 가니 괜히 여자애가 신경 쓰인다.
”경남아 잠깐 와봐라.”
”아 왜요!”
”뭐야 오라면 좀 올 것이지. 말대꾸가 심하네?”
”아 진짜. 방금 들어와서 힘든데..”
오늘따라 아빠가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와 있었다. 딱히 나눌 대화도 없는데 왜 오라는 건지.
”너 아빠가 오래간만에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이 태도는 뭐지? 어릴 때는 맨날 아빠 품에 안겨서 앵앵대더니 컸다고 이게 아주.”
”언제 적 얘기하는 거예요. 왜 불렀어요.”
”흠.. 그게 말이다.”
’보통 아빠가 뜸을 들이면 큰 결정사항을 얘기하려는 건데?’
침을 꿀꺽 삼킨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 여보. 바쁜 애 갖고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
”흥을 깨고 그래. 쯧.”
”뭔데요?”
”다다음 달에 너 전학 간다.”
”전학. 에? 왜요?”
”아빠가 직장을 옮기는 데 그렇게 됐어.”
”뭐 어디 멀리 가요?”
”조금 멀긴 하지?”
”아 어디길래!”
”영어는 좀 하냐?”
”뭐야. 미국 뭐 이런 데예요? 장난치지 말고.”
”비슷한데. 캐나다야.”
”엄마! 아빠가 하는 말 진짜야?”
”휴.. 그래. 거짓말 아냐. 엄마도 좀 심란해.”
”아니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요?”
”뭘 어떡해. 그냥 가는 거지. 뭐 따로 살려고? 나야 좋다만.”
갑작스레 이민을 간다고 하는 아빠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 몰라! 나 안 가고 싶은데!”
”야! 버르장머리가. 다들 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왜 그래.”
”하아 몰라요. 아 진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잔뜩 화가 나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뜬금없이 이민이라니.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친구들 얼굴이 떠오른다. 애들한테는 뭐라고 얘기해야 하는 걸까. 중학교 2학년 사춘기 거짓말 같이 이민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다. 정확하게는 이민당했다. 이 와중에 뜬금없이 소영이 얼굴이 떠오른다.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했는데..’
결국 말도 못 붙여보고 떠나게 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커졌다. 하지만 중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아빠의 결정에 따르는 방법 밖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자 얘들아. 다음 달에 경남이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학교는 오늘까지 다니기로 했어. 그동안 정 많이 들었을 텐데 인사 잘 나누고. 멀리 가서도 경남이가 잘 지내라고 우리 박수 한번 쳐주자. 자 박수.”
평소 늘 조용하게 지냈던 터라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늘 PC방에 같이 다니던 녀석의 표정이 퍽 슬퍼 보인다. 쓰고 있는 안경을 살짝 위로 올리더니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거 같은 동작을 취한다.
’아 뭐야. 진짜 우나?’
늘 장난기 많았던 애가 우니까 갑자기 마음이 슬퍼졌다.
”경남아 그동안 즐거웠어. 혹시 경남이랑 연락 주고받을 애들은 연락처 잘 주고받고. 한국에는 다음 달까지는 있는다고 하니까 가기 전까지 연락 잘 나눠라. 심심하면 학교 놀러 와도 되니까 언제든 오고.”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울지 않으려 했건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물도 나오려고 했다. 애써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땅바닥으로 시선을 향한다. 늘 어색하기만 했던 담임 선생님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준다. 하지만 그 행동이 지금 이 순간 엄청나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자리로 돌아오는 와중에 왜인지 모르게 소영이를 쳐다봤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소영이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소영이는 잽싸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영이가 울어? 설마 나 때문에?’
설마라는 감정이 컸지만 괜히 소영이의 우는 표정이 신경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