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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 1

그냥 써 보는 이야기 34

by 고성프리맨

어떤 선택이든 뒤에는 반드시 후유증이 남는다.

살아오는 동안 했던 수많은 선택 중, 가장 큰 후유증을 남긴 건 결국… 사랑이었다.

스무 살. 처음으로 여자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나이.

고등학교 때까진 만날 기회조차 없었으니, 여자는 그냥 ‘상상 속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오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친구, 선배 수많은 교류 속에서 나는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가끔은 썸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도 스쳤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알게 된 K 선배.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에게 그녀는 한 줄기 빛 같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참 많이 붙어 다녔다.




하루는 감기 기운 때문에 하루 종일 강의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날,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열 나서 뻗어있다며?”


K 선배였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손에 들려 있던 건 하얀 플라스틱 용기.


“… 죽이에요?”

“응. 내가 직접 끓였어. 엄마한테 레시피 물어봤다? 신입생 돌보는 것도 선배 몫이지. 맛은 보장 못하지만.”


누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책상 위에 죽을 내려놨다.

이성에게 처음 받아보는 이런 관심에 얼떨떨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안 먹어? 내가 일부러 이거 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아, 아뇨! 먹을게요.”


급히 숟가락을 들었다.


“맛없으면 솔직히 말해. 대신 다음엔 안 끓여준다?”

“… 아니에요. 진짜 맛있는데요.”


입 안에 퍼지는 따뜻한 국물이 몸을 녹여 내렸다. 순간, 괜히 심장이 두세 박자 빨라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너, 소문 들었어?”

“… 소문이요?”

“응. 우리가 맨날 붙어 다니니까, 다들 사귀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고.”


누나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눈이 마주치자 잠깐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감기 때문일 거다. 분명히.


“아, 아뇨! 그게… 뭐, 저는….”

“웃긴다. 긴장했지?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게.”


누나는 웃으며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손끝이 살짝 닿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열 많네. 죽 먹고 약도 사 왔으니까 꼭 챙겨 먹어.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그녀는 손을 뺐다.

나는 아쉬운 듯, 빠져나간 그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고마워요, 누나.”

“얼른 먹고 쉬어. 나 간다.”




며칠 뒤, 1학년 종강을 앞둔 어느 날.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방학 동안 뭐 할 거야?”


괜히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대답을 잘하고 싶어서였다.


“저, NGO 단체에서 활동해 보려고요. 봉사활동 비슷한 거요.”

“오? 의외인데? 왜?”


누나는 씨익 웃었지만, 눈은 진지하게 반짝였다.


“아는 친구가 거기 있어서… 경험 삼아.”

“흐음. 나도 그쪽 사람들 좀 아는데? 그럼 집에 갔다가 한 번 놀러 가 줄까?”

“…네?”

“왜, 싫어?”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그녀.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싫다니요! 완전 좋죠!”

“거짓말. 그래도 진짜 놀러 갈 거야. 거기서 다른 여자랑 친해지면 가만 안 둔다?”


누나는 커피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다른 여자가 어디 있어요. 저… 누나 말고는 친한 사람도 없는데요.”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웃음이 번졌다.


“그래? 알았어. 그럼 놀러 갈 때 연락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날의 대답 하나가 내 방학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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