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1

by 상상만두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에서 다루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비엔나의 예술가들이 욕망을 꿈꾸며 빈 디자인 공방을 세웠던 곳입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으로,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으로 비엔나의 예술가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클림트, 실레, 모저, 호프만, 게르스틀, 코코슈카 등의 작품과 삶, 그 뒷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던 19세기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보수적인 역사주의가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탐구했습니다. 이들의 도전과 실험은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자유를 꿈꾼 예술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과 협력하여 세기 전환기 비엔나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작품 191점을 전시합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레오폴트미술관은 '비엔나 1900년'을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 포스터, 공예품, 가구 등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으로 '비엔나 1900년'의 정수를 국내 최초로 선보입니다. 아울러 세기 전환기 도전과 혁신의 중심에 섰던 비엔나를 조명함으로써, 지금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비엔나의 문화사적 의미를 돌아봅니다. 세기 전환기 예술가들이 꿈꾸었던 자유를 향한 열망이 시대를 넘어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Vienna02.jpg

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 실레 (1890-1918)


에곤 실레가 그린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포스터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고요한 공간, 화면의 가장 위쪽에 그려진 이가 에곤 실레입니다. 탁자의 제일 윗자리에 자신을 그려 넣은 것에서 실레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18년 3월에 열린 이 전시회에서 실레는 분리파 전시관 중앙 전시실에 자신의 작품을 단독으로 전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비어 있는 실레의 맞은편은 사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자리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기에 실레는 그의 자리를 비워둔 것일까요?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비엔나 1900년, 꿈꾸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술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소한 영역은 없다.

"No area, no matter how small,
should be free from the artist's touch."


Vienna03.jpg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인상주의: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려는 예술 운동

** 상징주의: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내면의 감정, 상징, 꿈, 그리고 정신적 세계를 강조한 예술 운동

*** 아르누보: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곡선적이고 유기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 양식



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Vienna05.JPG


비엔나에 새로 지어진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습작으로, 실제 크기는 12미터에 이른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둘러싼 연회 장면을 그렸는데, 가운데에 디오니소스 흉상이 있고 양쪽으로 그를 숭배하는 두 여인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연회는 연극의 기원으로 여겨지는데, 클림트는 국립극장에서 연극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다. 그는 이 작업으로 1890년 황제상을 받을 정도로 큰 명성을 얻었다.


나는 세상이나 인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그립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Vienna06.JPG

하나 지역의 소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3년경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품에 제작 시기가 쓰여 있지 않지만,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렸다. 소녀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이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Vienna07.JPG

노인의 옆모습,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6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까닭에 누군가가 주문한 초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림 속 인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배경을 단색으로 칠해서 노인의 옆얼굴에 더욱 눈길이 머문다. 클림트가 인물화에서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Vienna08.JPG

몽환적인 느낌이 나는 클림트만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초상화

정면을 보지 않고 자유러운 포즈의 초상화입니다.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8년경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구스타프 클림트는 외국의 선진 예술을 경험하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대 후반 클림트의 초상화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련된 모자를 쓰고 소매가 풍성하게 부푼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이 파란 눈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여인 뒤쪽에 우거진 수풀과 블라우스 소매를 거친 붓놀림으로 두껍게 칠해 표면 질감이 두드러지도록 표현했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클림트만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배경은 아주 거친 터치로 표현했지만 얼굴은 정교한 느낌이 들도록 처리해서 더 돋보인다.



Vienna10.JPG

제1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페르디난트 안드리 (1871-1956), 1901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이 참여한 제10회 전시회를 홍보하는 포스터다. 페르디난트 안드리는 강렬하고 선명한 색상을 좋아했지만 이 포스터에서는 매우 연한 청록색을 사용했다. 구불거리는 선과 호숫가 풀이 물에 비친 모습은 물가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는 관람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한 장식미술 양식인 유겐트슈틸*의 특징을 보여 준다.


* 유겐트슈틸: 19세기말 유럽에서 나타난 장식미술 양식인 '아르누보'의 독일어식 명칭. 식물 등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과 장식적인 선이 특징.




Vienna11.JPG


제16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제로 열린 제16회 전시회에서는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적 자유와 혁신을 강조했다.

또한 분리파에서 발행한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을 특별한 주제로 다뤄 진보적인 예술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알프레드 롤리는 단순한 형태와 추상적인 장식의 석판화로 포스터를 만들었다. 얼아보기 어려운 굵은 서체는 롤러가 사랑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사용한 방식이다. 굵고 글자 간 간격이 좁은 서체는 롤리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Vienna12.JPG


제16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제로 열린 제16회 전시회에서는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적 자유와 혁신을 강조했다. 또한 분리파에서 발행한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을 특별한 주제로 다뤄 진보적인 예술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알프레드 롤러는 단순한 형태와 추상적인 장식의 석판화로 포스터를 만들었다. 알아보기 어려운 굵은 서체는 롤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사용한 방식이다. 굵고 글자 간 간격이 좁은 서체는 롤러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Vienna13.JPG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탄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혁신의 상징인 베토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이 전시회를 열었다. 알프레드 롤러가 그린 포스터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상징과 장식이 돋보인다. 한 여성이 손에 든 빛나는 물체를 보기 위해 몸을 굽히고 있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 물체는 비엔나 예술계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이상을 보여 준다.



Vienna14.JPG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1883-1932)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예술전람회'는 20세기 초 비엔나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전시였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에서 탈퇴한 구스타프 클림트와 동료들은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새롭고 실험적인 예술 운동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에곤 실레는 대중에게 작품을 처음 공개했고, 오스카 코코슈카 등 다른 젊은 예술가들도 참여했다. 루돌프 칼바흐는 이 전시회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숲 앞에서 무릎을 꿇은 여인을 표현했는데,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한다.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 모리츠 네어 (1859-1945)

1902년 사진 비엔나 이 마그노 사진 기록 보관소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테터 수집)


'베토벤 전시회'라고도 불리는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개막하기 직전, 모리츠 네어가 찍은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의 단체 사진이다. 네어는 개막을 준비하던 예술가들을 중앙 전시실로 모아 자세를 잡게

한 뒤 사진을 찍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사진 연출을 통해 인물의 개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Vienna43.jpg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Vienna16.jpg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과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콜로만 모저 (1868-1918)

1897년 트레이싱 중이에 수제, 불투명 수채 물감, 색 불펜, 금색 안료 레오팔트미술관


클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이 포스터는 1898년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초기에 모저는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선과 상징을 많이 활용했다. 이 포스터에도 추상적인 형태 속에 글씨와 인물을 표현했다. 포스터 위쪽에 적힌 'Ver Sacrum,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은 1898년부터 발행된 잡지의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비엔나 분리파의 이상을 보여준다.



Vienna17.jpg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1호

1898년 1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성스러운 봄』 창간호는 1898년 3월에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표지 가운데 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세 개의 상징적인 표지가 열매처럼 달려 있다. 이는 예술의 기본이 되는 세 분야인 건축, 회화, 조각을 상징한다. 화분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와 라틴어 제목인 'Ver Sacrum(베르 사크룸), ' 즉 '성스러운 봄 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 비엔나 분리파를 상징한다.



Vienna18.jpg
Vienna19.jpg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9호

1898년 9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종이에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 요소가 두드러지는 표지 디자인이다. 비엔나 분리파는 장식미술 양식인 유겐트슈틸에 담긴 미적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표지 디자인은 전통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분리파의 노력을 상징한다.




Vienna20.jpg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10호

1898년 10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성스러운 봄』의 표지 디자인에는 일본 목판화의 회화적 요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자포니즘'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미술은 유럽에서 큰 인기가 있었다. 이 표지에서 공간의 깊이감 없이 표현된 나무 역시 일본 목판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Vienna21.jpg


Vienna22.jpg
Vienna23.jpg
Vienna24.jpg
Vienna25.jpg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를 위한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8년, 카드보드에 연필(23), 종이에 연필(24-26), 불투명 수채

오스트리아 포스트 AG


23.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60 헬러

24. 황제 프란츠 1세(2세), 30 헬러

25. 황제 레오폴트 2세, 20 헬러

26. 카를 6세, 2 헬러


콜로만 모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8년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비엔나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엔나 분리파를 지지했다. 모저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우표의 테두리를 각각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술이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모저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업이다.



Vienna26.jpg
Vienna27.jpg


베토벤의 집이 있는 거리를 그린 목판화 연작

카를 몰 (1861-1945)

1903-1906년 종이에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20. 베토벤하우스 9호, 뫼들링 하우프트슈트라세 79번지

21. 베토벤하우스 10호, 뫼들링 하우프트슈트라세 79번지


카를 몰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과 협력해 '베토벤하우스'라는 목판화 연작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머물렀던 비엔나의 집들을 묘사했다. 몰은 비엔나 분리파가 존경했던 베토벤의 삶과 관련된 장소들을 그렸다. 이 연작은 간결하고 세련된 몰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준다. 르네상스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목판화는 19세기 유럽에서 다시 유행했고 비엔나에서도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Vienna28.jpg


벨베데레 궁전

카를 몰 (1861-1945), 1909년경 종이에 다색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목판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카를 몰 역시 비엔나 풍경을 담은 판화를 많이 만들었다. 이 판화는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조각상에서 쭉 뻗은 정원 길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몰은 빛의 반사와 섬세한 색감을 세련되게 활용하여 겨울 분위기를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텍스트와 이미지가 조합된 형식이 너무 새롭게 느껴졌다.

100년 전 타이포의 시도가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II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New Perspectives: Transformed Austrian Landscape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지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Vienna29.jpg


큰 포플러 나무 II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는 휴가를 보낸 아터제 호수 근처 예배당 풍경을 그렸다. 우뚝 솟은 거대한 포플러 나무가 강한 인상을 준다. 다양한 색으로 점을 찍어 포플러 나무를 그렸는데, 한 평론가는 반짝이는 듯한 잎의 표현이 '송어의 비늘' 같다고 평했다. 화면 가득 휘몰아치는 바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하늘을 표현해 긴장감이 감돈다. 클림트가 도시적인 인물화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Vienna30.jpg


호에 바르테의 겨울 카를 몰 (1861-1945)

1904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카를 몰은 비엔나 분리파의 공동 창립자로, 구스타프 클림트와 가깝게 교류다. 그림의 배경인 되블링 지구의 호에 바르테는 문화, 예술계 주요 인사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다.

카를 몰과 콜로만 모저는 1901년 이곳으로 이사했는데, 요제프 호프만이 그들의 집을 디자인했다. 눈길 위로 그늘이 드리워진 호에 바르테의 겨울 풍경에 고요함과 쓸쓸함이 감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듯 길 위에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고, 나무 사이로 뻗은 길이 눈 쌓인 언덕으로 이어져 깊은 공간감이 느껴진다.



Vienna31.jpg


쇤브룬에서 카를 몰 (1861-1945)

1911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카를 몰의 풍경화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섬세한 빛과 독특한 색채로 유명하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을 그린 이 작품에서 몰은 햇빛의 미묘한 변화와 그림자로 색감이 달라지는 풍경을 파스텔의 부드럽고 조화로운 색조로 표현했다. 몰은 이러한 색채를 사용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기보다 그림에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Vienna32.jpg


깊은 숲

안톤 파이슈타이어 (1887-1930),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숲이 펼쳐져 있다. 햇빛에 물든 숲이 조화로우면서도 대비가 강렬한 빛과 어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숲으로 난 길을 따뜻하고 밝게 표현해 어두운 숲과 달리 평온한 느낌을 준다. 안톤 파이슈타우어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등과 교류하며 전통 예술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탐구했다.


Vienna33.jpg


언덕 아래의 마을 에곤 실레 (1890-1918)

1907, 카드보드에 유화, 패널에 부착 레오폴트미술관


비탈면 아래에 집과 나무가 있는 가을 들판의 풍경을 그렸다. 멀리 비탈을 따라 너른 들판과 목초지가 펼쳐진다.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긴 듯하지만, 실제로는 섬세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래쪽 들판의 가볍게 물결치는 가는 선과 위쪽 언덕의 두텁고 거친 붓질이 대조를 이룬다. 실레는 대상을 그릴 때 다양한 관점과 구도를 실험했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에 그린 풍경화에서 잘 드러난다.




Vienna34.jpg


가을 숲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카드보드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가을에만 볼 수 있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어둡고 우울한 색채로 깊어 가는 가을 풍경을 묘사해 사색하며 길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르익은 깊은 가을의 색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계열의 갈색을 사용했다. 화면 색감은 어둡지만 곳곳에 밝은 노란색의 낙엽이 그려져 있어 가을 숲에서 이어지는 자연의 생명력을 볼 수 있다.



Vienna35.jpg


호숫가의 남녀

에른스트 슈퇴어 (1860-1917), 1897/19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낸다. 슈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다.



Vienna37.JPG
Vienna38.JPG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 (1880-1947),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이 그림은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이다. 황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 여름날 풍경을 묘사했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 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물감을 얼마나 두툼하게 처리했는지 알 수 있다.

거친 터치의 질감과 반사까지 고려해서 그려진 작품입니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같은 느낌입니다.



Vienna39.JPG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해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해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Vienna40.JPG


실비아 콜러 (화가의 딸)

브치아 콜러-피넬 (1863-1934), 1926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다.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Vienna41.JPG


여인의 초상

브론치아 콜러-피넬 (1863-1934), 연대 모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주인공의 어두운 색 옷이 이 화폭의 절반을 차지해 얼굴과 목의 밝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머리를 살짝 기울인 여성의 시선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긴다. 배경의 노란색 벽지에는 다양한 색의 동물과 식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자주 만들던 벽지 미자인이다.





Vienna42.JPG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이제 대중은 '비엔나 분리파 스타일'을 원하게 될 것이다.
"The public will soon want the style of the Vienna Secession."




산맥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콜로만 모저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여러 겹의 산을 그렸지만, 지형을 충실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노란색 하늘 아래로 푸른 선을 그어 산맥을 구분했고, 옅은 색과 어두운 색의 대비를 강조했다. 모저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간결한 구성과 색의 강한 대비는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Vienna45.jpg
Vienna46.jpg


빛과 색의 마법, 모저의 꽃 그림 콜로만 모저 (1868-1918)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칠엽수 꽃, 1912년경


마리골드, 1909년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디자인 공방을 떠났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띠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Vienna47.jpg


동굴 속의 비너스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에서는 노란색을, 어두운 부분에서는 옅은 보라색을 띤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다.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914년 무렵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Vienna48.jpg
Vienna49.jpg


색채의 실험, 모저의 풍경화

콜로만 모저 (1868-1918)


50 구름 습작

1914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51 레장 (르 샤모세르 산)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떠난 콜로만 모저는 회화 작업에 집중했고 특히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1913년 제네바에서 스위스 상징주의 화가 페르디낭 호들러를 만났다. 호들러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순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는 모저의 화풍에 영향을 주었다. 모저는 1916년까지 <구름 습작>을 포함해 볼프강 호수를 그린 여러 점의 풍경화를 남겼다.



Vienna50.jpg


깊은 숲 (<아베>를 위한 습작)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895,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희미한 빛이 어린 울창한 숲 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다.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기에 차가움이 느껴진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다.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1809년 벼르기 젤 전투라는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종교적 주제를 결합해 그린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다.



Vienna52.jpg
Vienna51.jpg


고향에서 영감을 얻은 풍경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54 노동자, 1910년


55 외츠탈 풍경, 1911년


뮌헨과 비엔나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알빈 에거-리엔츠는 늘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는 고향에서 영감을 받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두거나 쉬고 있는 시골 사람들 의 풍경을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한편 에거-리엔츠는 뮌헨과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며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특히 오귀스트 로댕의 영향을 받아 웅장한 조각이 떠오르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점심 식사 (<수프> 두 번째 그림)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알빈 에거-리엔츠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티롤 농부들의 일상을 경건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큼직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조용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다.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침착하고 평온한 분위기다. 왼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잘 이용해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두드러지고 전체 색감이 조화를 이루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풀밭과 통나무집 풍경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에거-리엔츠는 같은 주제로만 25점의 그림을 남겼을 정도로, 이 주제와 표현 방식을 깊이 탐구했다.




상품에 적용된 예술 작품들입니다.

100년 전에 이런 디자인의 기초를 만들어 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독특하게 보였을까요~


Vienna55.JPG
Vienna58.JPG
Vienna56.JPG
Vienna57.JPG
Vienna59.JPG
Vienna60.JPG



III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Art in Everyday Life: The Founding of the Vienna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 영국 예술공예운동: 19세기 후반 산업화에 반발하여 수작업의 가치를 강조하며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한 예술 운동


** 바우하우스: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디자인과 건축을 선도한 독일의 예술학교





Vienna61.jpg


요제프 호프만 Josef Hoffmann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 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 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언젠가는 생필품도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
"The day of purchasing
even everyday goods from artists will come."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Vienna62.JPG


안락의자, 721번 비엔나 전신국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오토 바그너 (1841-1918),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1902년 무렵 비엔나 전신국 사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의자다. 그는 전통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디자인을 추구했다. 수증기로 나무를 부드럽게 한 뒤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려 곡선을 표현했다. 이 의자를 만든 '야코프 & 요제프 콘'은 1900년 무렵 비엔나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가구 회사로, 요제프 호프만과 콜로만 모 등이 디자인한 가구를 만들었다.



Vienna63.JPG
Vienna64.JPG
Vienna65.JPG
Vienna67.JPG
Vienna68.JPG


패턴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럽다. 색채도 너무 예술적이다.


Vienna68.JPG
Vienna69.JPG
Vienna70.JPG
Vienna71.JPG
Vienna72.JPG
Vienna73.JPG
Vienna74.JPG
Vienna75.JPG
Vienna76.JPG
Vienna77.JPG


조형적인 미가 아주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IV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Intense Emotions: Pioneers of Expressionism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Vienna78.JPG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에곤 실레 (1890-1918)

1908년, 캔버스에 유화, 금색과 은색 안료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1907년 클림트를 만난 후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졌는데, 이는 클림트가 풍경을 그릴 때 즐겨 쓰던 방식이다.

장식적으로 식물을 표현하고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은 것 역시 클림트 화풍의 영향이다. 깊은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표현된 식물이 깊이감 없는 배경과 대조를 이룬다.

거의 단색으로 배경을 그린 듯하지만, 반짝이는 금색과 은색 안료를 사용해 장식 미술의 영향이 드러난다.




Vienna79.JPG


소년과 큐피드

안톤 콜리히 (1886-1950),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안톤 콜리히는 신예술가그룹에서 활동하며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이끌었다.

콜리히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평생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특히 남성 누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벽을 등지고 선 소년은 이미 어른에 가까운 큰 발과 건장한 몸을 보여 주지만 다소 부끄럽고 어색한 모습이다. 옆에 있는 사랑의 신 큐피드는 소년이 사랑을 알게 되는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Vienna80.JPG


여성의 초상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1887-1973),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부유한 후원자로 추정된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로 화가로 전향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이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Vienna81.JPG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90-1969), 1913/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허름한 회갈색 벽 앞에 앉은 소녀는 팔꿈치를 잡은 조심스러운 자세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소녀의 어두운 눈 주변은 방금 운 듯 붉은 기운이 감돈다.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인물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반발하여 신예술가그룹의 설립에 참여했다.

또한 새로운 예술 경향에 동참하여 개성 있으면서도 강렬한 감정 표현법을 연구했다.




Vienna82.JPG


와인 잔을 앞에 둔 화가의 아내

안톤 파이슈타이어 (1887-1930), 191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습관


안톤 파이슈타우어는 와인 잔을 앞에 두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자신의 아내를 그렸다.

에곤 실레가 주도한 신예술가그룹의 창립 회원이었던 파이슈타우어는 유럽 예술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특히 후기 인상주의자 풀 세잔의 구도와 구성을 연구했다. 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물감을 두껍게 올려 붓이나 나이프 자국을 표면에 남기는 임파스토 기법을 작품에 활용했다.

이 작품에서는 아내가 입은 옷의 질감과 명암의 대조를 강조하는 강렬한 붓 자국으로 깊은 인상을 준다.





Vienna83.jpg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 (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답은 그림 그 자체에 있다.
"The answer to why I pursued painting is found within painting itself."



Vienna84.jpg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5/0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 준다.



Vienna85.jpg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삭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포스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루돌프 칼바흐가 디자인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이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예술 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Vienna86.jpg


피에타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9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9년 비엔나 국제예술전람회에서 공연한 연극의 극본을 직접 썼다. 이 연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폭력과 욕망에서 비롯된 권력 투쟁으로 묘사했고, 강렬한 감정과 파괴적인 주제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코코슈카는 자신의 연극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도 직접 만들었다. 피 흘리는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 도상이 그려진 이 포스터 에는 애도하는 모습 대신 분노에 찬 야수 같은 성모가 등장한다. 거친 글씨체는 이 그림과 연극에 담긴 잔혹하고 격렬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Vienna87.jpg


양쪽에서 본 자화상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23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1923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자신의 두 얼굴을 하나로 합쳐서 그린 이 작품은 입체주의와 비슷한 표현법을 보여 준다. 예술가로서 코코슈카의 정체성과 서로 다른 두 자아가 드러난다.


1937년 나치가 개최한 '퇴폐 미술 전시회'에 전시된 이 작품은 나치 세력으로부터 강한 비판과 조롱을 받았다. 코코슈카는 이 전시회의 영향으로 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Vienna88.jpg


나무와 집이 있는 풍경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07년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자신이 직접 본 장소에서 받은 영감을 활달한 붓질의 풍경화로 그려 냈다. 세로로 긴 이 작품의 오른쪽에는 가느다란 나무가 높이 서 있다.


나무의 위아래는 그림의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다. 공간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화면 구성에서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짧고 강한 붓질로 들판과 나뭇잎을 그렸는데, 게르스들이 색채의 질감 표현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Vienna89.jpg


트라운 호수와 '잠든 그리스 여인' 산 풍경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76, 엔버스에 유화, 카드보드에 부착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1907년 여름을 보낸 트라운 호수와 그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렸다. 이 작품에 그려진 에놀라코겔 산은 트라운 호수 동쪽에 보이는 높은 산으로, 그 능선이 여성의 옆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잠든 그리스 여신'이라고 불렸다. 이 작품에서 게르스틀은 세심하게 표현함 부분과 넘은 붓으로 활달하게 표현할 부분을 구분했다.


특히 바위와 숲을 매우 마르고 격렬한 붓질로 칠했다.

이 시기 게르스틀이 신인상주의에서 자유로운 표현주의 양식으로 전환했음을 알 수 있다.



Vienna90.jpg


발데마어 웅거의 초상 II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1901년 비엔나 미술아카데미를 떠나 인상주의를 탐구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던 시점에 그린 작품이다. 게르스틀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변호사 지망생이던 발데마어 응거의 진지한 모습을 검은 재킷과 넥타이, 높은 흰색 칼라로 표현했다. 또한 이마와 눈 아래를 흰색으로 덧칠해 밝은 얼굴을 강조했다. 자신감 있는 표정과 눈빛에 야망을 품은 명석한 주인공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Vienna91.jpg


리하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Vienna92.jpg


스마라그다 베르크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6/07년 캔버스에 유학 개인 소정


상류층 집으로 보이는 공간에 한 여인이 밝은 빛을 받으며 앉아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점으로 색을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해 공간을 표현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스마라그다 베르크이다.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알반 베르크, 아르놀트 쇤베르크 같은 음악가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음악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고, 격렬하고 힘 있는 붓질로 감정을 표현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Vienna93.jpg


반신 누드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파란색에 가까운 청록색 배경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머리 주변을 빛나는 파랑으로 칠해 후광의 효과를 냈다. 엄숙하고 침착한 표정, 강렬한 눈빛 등 세밀한 표현을 담은 얼굴에 비해 손과 같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했다. 천으로 감싼 하체 부분에는 캔버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게르스틀의 시선은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만, 관람자의 눈보다 더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Vienna94.jpg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께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슈바르츠발트 부부의 아파트는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들 부부는 재정 후원과 더불어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헤르만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얼굴과 손을 가장 강조했다. 코코슈카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질감을 강조하거나 긁어내는 등 독특한 기법으로 헤르만의 내면을 화폭에 표현했다.




Vienna95.jpg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는 예술가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 주었다. 실레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어두운 옷을 입은 인물과 강렬한 붉은색의 리 열매가 작품 좌우에서 균형을 이룬다. 어깨를 살짝 돌리고 관람자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자신감과 연약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얇고 세밀하게 그려진 선에서는 실레의 예민한 성격과 내면의 불안한 감정이 전해진다.




V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Radical Lines: The Artistic World of a Young Genius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Vienna96.jpg


소녀의 초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Vienna97.jpg


긴 머리를 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Vienna98.jpeg


에곤 실레 Egon Schiele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썩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남길 열매가 될 것이다.
"I will be fruit that provides an eternal vitality, even when decayed."


Vienna99.jpg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Vienna100.jpg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색분필 레오폴트미술관


한쪽으로 몸을 돌려 정확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더욱 돋보인다.



Vienna101.jpg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플드미술관


1910년 무렵 에곤 실레는 누드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고 훨씬 성숙한 표현주의 화법을 선보였다. 실레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가며 자세를 연구했다. 이 반신 누드의 남성 역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강한 선으로 그린 남성의 깡마른 몸은 과장된 비례와 비틀린 자세로 실레 특유의 인체 표현을 보여 준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열게 칠해진 몸과 굽은 손의 색감은 과장된 표현을 강조한다.



Vienna102.jpg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실레는 이 작품에 '스스로를 보는 이' 또는 '죽음과 인간'이라는 두 개의 제목을 붙였다.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고, 그 뒤로 두 번째 자아가 유령같이 그려져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유령이 인물의 어깨를 감싼다.


주인공은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자아에서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이 작품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아래에서 뻗어 올라온 '손'이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손을 내면 심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또한 어두운 색조와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의 고통과 불안함을 표현했다.



Vienna103.jpg


시인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Vienna104.jpg


계시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을 그의 편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계시>!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을 일평생 소비하며 살아갈 뿐이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더 이상 빛나지 못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발하는 넘치도록 충분한 빛은 무릎 꿇은 작은 인물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한다."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전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Vienna105.jpg


어머니와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Vienna106.jpg


어머니와 두 아이 II

에곤 실례 (1890-1918), 1915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어머니는 얼굴과 맨발을 제외한 몸 전체를 초록색 천으로 가리고 있다. 어머니의 움푹 꺼진 눈과 입은 해골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누운 아이 역시 죽어 있는 듯하다. 실례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피에타~에 빗대 이 작품을 그렸다. 어머니의 왼쪽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어린아이가 한 명 더 있다.

줄무늬 옷의 다채로움은 순수함과 희망을 상징하지만, 얼굴에서는 절망감이 엿보인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였던 실레의 불안과 상실감, 그리고 내면의 갈동을 보여 준다.



Vienna107.jpg


고개를 기울인 소녀 (게르티 실레)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고개를 약간 뒤로 하여 옆으로 기울인 이 여성은 에곤 실레의 동생 게르트루데 실레다. '게르티'는 그녀의 애칭이다. 실레보다 두 살 어린 그녀는 실레의 삶과 예술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어머니와 불안한 관계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다. 게르트루데는 실레의 초기 작품에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Vienna108.jpg


머리에 검은 리본을 단 소녀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크레용, E. 와 H. H. 컬렉션


한 소녀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에곤 실레는 소녀의 옆모습을 섬세하고 정확한 선으로 그렸지만, 나머지 부분은 거의 생략했다. 소녀가 앉은 의자는 형태를 거의 그리지 않고 대부분 여백으로 두었다. 세로줄 무늬의 스타킹이나 옷의 정교한 세부 표현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정식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Vienna109.jpg


천을 두른 여성의 뒷모습 <개종 II>의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의 원작인 <개종 II>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Vienna110.jpg


애도하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대널에 유화 레오콜트미술관


어두운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의 얼굴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해골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머리 뒤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꼭 다문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은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실레는 인물화에서 종종 두 개의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사용해 인물 내면의 갈등, 분열된 정체성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실레가 이중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내면을 다루던 방법이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Vienna111.jpg


골고다 언덕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캔버스에 유화, 불투명 수채,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얼핏 보면 에곤 실레가 살았던 노이바흐 근처 들판을 그린 작품 같지만, 실레는 이 들판의 풍경을 빌려 골고다 언덕을 표현했다. 여러 요소를 활용해 자연을 종교적 숭배의 장소로 만들어, 실레의 초기작이지만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준다. 십자가 옆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색색의 띠로 묘사된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어, 지는 석양과 함께 골고다 언덕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준다.



Vienna112.jpg


도나우강의 슈타인 마을 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마을 뒤 언덕에서 도나우강을 내려다본 풍경을 그렸다.

실레는 자신이 살았던 역사적인 도시 풍경에서 강한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그 지역의 독특한 분위기에 자연과 건물이 어우러지면서 실레만의 표현주의 화풍으로 발전했다. 실레는 마을 건물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고르고 다시 배치해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 풍경을 만들어 냈다. 마치 콜라주 작업처럼 도시의 요소들을 다시 조합하여 본인이 원하는 풍경으로 새롭게 그려 냈다.



Vienna113.jpg


언덕 위의 집과 벽의 풍경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어머니 마리 실레의 고향인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 오늘날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지역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크루마우의 중세적인 도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작은 탑이 있는 집과 울타리가 있는 풍경을 일그러진 형태로 그렸다. 특히 오른쪽 톱니 모양의 벽은 실레가 크루 마루에서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뒤쪽으로 울타리가 뻗어 있거나 언덕이 있는 그림 속 풍경은 사실과 달라 실제 장소를 그대로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Vienna114.jpg


블타바강 가의 크루망우 (작은 마을 IV)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컨버스에 유화, 검은 분들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크루마우의 슬로스베르크 언덕 건너편 마을 풍경을 그렸다. 마을 집들을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는데, 실레가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두워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난다.



Vienna116.jpg


작은 마을 I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크루마우의 블타바강 가에 있는 마을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실레의 기억에 남은 풍경의 조각들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표현했다. 색색의 건물들이 어두운 강변을 따라 그려져 있어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건물들은 여러 색을 피고 있지만 지붕과 길, 강은 검은 색조로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준다. 실레는 자신이 머물렀던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 스스로 느꼈던 고립감과 소외감을 검은색으로 표현해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를 그려 냈다.



Vienna115.jpg


들판의 풍경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드넓은 평야가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다. 각각의 밭을 촘촘한 선으로 채워 서로 구분했는데, 마치 추상적인 구조물처럼 보인다. 왼쪽 아래 작게 그려진 집 뒤로 두 개의 밭만 따로 떨어져 있는 모습은 마치 비밀을 숨긴 암호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선을 다루는 에곤 실레의 뛰어난 실력과 함께 기하학적인 형태를 강조한 점이 특히 눈에 띈다.



Vienna117.jpg


판자 지붕 집

<판자 지붕 집(오래된 집 II)>을 위한 습작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슬관


크루마우 지역의 오래된 집을 정교한 구도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은 실레가 1915년 완성한 <판자 지붕 집 (오래된 집 1I)>을 위한 습작이다. 실레는 이 작품을 옮겨 그리면서 집의 앞뒤에 있는 건물을 없애는 등 가상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이 습작에서는 연필로 강약을 다양하게 조절하여 선을 그렸고, 창문 하나만을 검은색으로 칠해 그림에 깊이감과 활력을 더했다.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시기는 짧았지만 실레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말려 올라간 속옷을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렸다. 모델의 머리는 소용돌이 같은 선으로, 얼굴은 반원 등 간략한 선으로 그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15년 무렵, 실레는 개성 있는 얼굴 대신 개인의 특징을 생략한 기하학적 형태로 인물을 표현했다. 실레의 특징이던 '말하는 듯한 눈'도 텅 빈 구멍처럼 묘사했다.



Vienna119.jpg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연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롤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이 그림에서 '위에서 바라본 누드'라는 어려운 구도를 능숙하게 표현했다. 여성은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안정적이고 명확한 몸의 구조를 보여 준다. 관람자의 시선은 여성의 척추가 보이는 곡선에 집중되는데, 윤곽선을 따라 칠하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색, 명암을 나타내는 선의 활용으로 인체 표현에 생생한 입체감이 더해진다. 여인의 몸은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라 있다. 실레에게 마른 몸은 고통과 고뇌 같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Vienna120.jpg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꿈은 여성 (발리 노이칠)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깊은 분별, 수세,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수채화로 그려진 생동감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이다. 그녀의 붉은 머리와 발그레한 뺨이 짙은 회색 망토와 대조를 이룬다. 망토의 주름에 마치 위에서 빛이 떨어지못 명암 효과를 주어 질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발리는 1911년부터 실례의 모델이 되었고, 누드 도로임 등 많은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실레는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1915년 발리와 헤어졌다.




나는 창조자이자 창조물입니다. 나의 예술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에곤 실레



Vienna122.jpg


서 있는 세 여성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8년 (미원),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

To Art its Freedom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러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고 개척했던 예술가들을 만나며 자신이 걸어갈 길을 꿈꿔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Vienna123.jpg


100년 전의 디자인의 태동을 본 것 같아 기분이 뿌듯했다. 대선배들의 작품을 본 것 같아서다.

클림트 작품이 작은 게 아쉬웠지만 에곤실레의 라인 아트를 많이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전시를 본 것 같아 좋았다.







keyword
이전 26화우연히 웨스 앤더슨 2: 모험은 계속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