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2020년 2월에 정년퇴직을 하셨다. 무려 40년이 넘게 한 직장에서 일을 하신 후였다. 임신을 했던 80년대는 육아 휴직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도 전이라, 출산휴가 명목으로 한 달 정도 쉬고 바로 복귀를 하셨단다. 당연히 나는 내내 워킹맘의 아들로 자랐고, 어린 시절에는 엄마를 많이도 찾았었다.
철없는 아들은 출근시간부터 엄마를 힘들게 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빠와 함께 엄마를 배웅하는 것이 눈곱도 미처 떼지 못한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많이도 울었단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내게 껌을 하나씩 주셨다. 껌종이를 까는 사이에 엄마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혔고, 껌을 입에 집어넣고서는 아빠를 보고 엉엉 울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빠는 어떻게 매일 나를 달래고 출근을 하셨을까?) 나중에 들었는데, 12층 우리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얘기를 하셨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출근하는 엄마를 붙잡고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출근한 엄마가 보고 싶은 순간은 많았다. 비 오는 날 특히 그랬다.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는데, 엄마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산을 들고 정문에 마중을 나오셨다. 몇 번은 엄마들 사이에 우리 엄마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실 수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 접이식 우산을 넣고 다녔다.
우산이 들어있던 내 가방은 항상 불룩했다.
방학 때도 엄마가 집에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보통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방학을 하면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져 심심하고 지루해했던 기억이 있다. 형제도 없는 외동이었기에, ebs 방송을 잠깐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케이블 tv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던 초등학교 시절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비디오 게임뿐이었다. 하지만, 조이스틱 게임은 누군가 상대가 있어야 재미가 있다. 외로웠던 나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댔고, 우리 집은 오락실을 방불케 했다. 퇴근하고 오시면, 놀이터에서 뛰놀던 사내 녀석들이 남긴 흔적으로 거실에는 모래가 흥건했고, 싱크대에는 물컵이 수도 없이 꺼내져 있었다.
소풍을 가는 날도 비슷했다.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맛있는 김밥을 싸주셨고, 난 옆에서 김밥 꼬다리를 얻어먹으며 아침부터 행복했다. 소풍도 대부분 즐거웠고, 새로운 경험이 가득한 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풍이 끝난 이후였다. 소풍을 가는 날은 평소보다 늦게 집에 오다 보니, 당연히 엄마가 집에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초인종을 누르고, 엄마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4시에 엄마가 집에 오셨을 리는 없다.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있었던 신나는 얘기들을 하기 위해서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다. 다른 날보다 더 짧은 시간을 기다리면 되는데, 그날은 그 시간이 훨씬 길게 느껴졌나 보다. 아직도 기억이 날만큼.
결핍된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워킹맘의 딸로 자랐던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우리 반 아이들 중에도 하교 후에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겠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는 예전의 나나 아내 같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이 들 틈도 없게 만들려고 학원을 뺑뺑이 돌린다고도 하던데... 일을 하는 엄마의 커리어도 유지할 수 있으면서, 엄마의 빈자리로 인한 아이들의 결핍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