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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주카 Aug 13. 2022

피델 카스트로 탄생과 중남미의 공산독재 신호탄

1926년 8월 13일 쿠바의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인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Fidel Alejandro Castro Ruz)는 쿠바 마야리의 비란(Biran)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델은 항상 군사 역사와 일에 예리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뛰어난 지능으로 그의 부모는 그를 여동생 안젤리타와 함께 여섯 살 때부터 산티아고 데 쿠바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람은 나면 한양으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던가?

1960. 05. 10.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브리티니커

산티아고와 나중에는 아바나에서 피델은 1950년 법학부를 졸업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그때부터 카스트로는 다양한 정치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긴급 법원에서 독재자 풀제니코 바티스타를 비난하고도 다른 결과를 받은 후 카스트로는 무장 투쟁이 정부 시스템 변화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해했다.


그는 독재자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면서 그 이유로 1953년에 체포됐다. 22개월의 복역 후 석방된 그는 멕시코로 망명해 바티스타 전복 계획을 수립했다. 카스트로는 1957년 82명의 반군으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으로 배를 타고 쿠바로 돌아왔다. 그들 중에는 아르헨티나의 에르네스트와 체 게바라고 있었다.

1964년의 피델 카스트로/브리태니커

게릴라전 이후 섬의 농촌 지역에서의 투쟁은 도시로 확대됐다.


카스트로가 주도한 혁명은 1958년 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바티스타는 해외로 도피했다. 1959년 1월 1일 혁명군의 승리가 선포됐다.


카스트로는 그의 사회주의 정책을 특징으로 하는 정권을 기반으로 집권했다. 쿠바의 공산혁명의 성공과 그의 장기집권의 신호탄이 됐다.


총리로서 그는 대규모 개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1961년에 플라야 히론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망명자들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를 미주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건국했으며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면서 쿠바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적이 됐고 냉전 기간 큰 긴장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그 이후로 두 나라의 관계는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이 쿠바에 유지해 온 경제적, 상업적 봉쇄로 보여줬던 첨예한 관계가 유지됐다.

UN 일반의회에서의 피델 카스트로.1979. 10. 14./브리태니커

2006년 말부터 피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지도자가 직면한 심각한 건강 문제가 발생하자 정권을 이어 받았다. 인생 새옹지마요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카스트로는 이제 뒤안길로 가야 했다.


라울은 이미 오랜 동안 2인자 자리를 지켰고 1997년 공식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후계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위암 수술 이후 피델의 공개 모습은 드물어졌고 그의 빈자리는 사진으로 채워졌다.


중남미의 맹주로 자리잡고 싶어 했던 그도 인생의 끝은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출생은 냉전의 한 고리가 됐으며 쿠바를 미국과 대등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의 불장난이 됐던 것 같다. 이제 쿠바는 세상을 향해 손짓을 하지만 오랜 기간 폐쇄됐던 섬은 아직도 배가 가야만 하지 않을까?




#피델카스트로 #쿠바 #체게바라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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