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이 아닌 낙관을 택할 수 있는 이유
유달리 기운 나고 희망찬 아침이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 눈을 떴는데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어떤 열의와 욕구가 내면에서 느껴진다. 이부자리에서 뭉그적거리기보다 몸을 일으켜 움직이고 싶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해질 때 이런 상태가 된다. 내 노력과 그로 인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진전시킬 힘을 절로 얻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계획하고 수행하고 검토하고 개선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덕분인지 그럴 때마다 남모를 기쁨이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송두리째로 뒤엎는 것이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실망감이다. 잘 차린 밥상이 외력에 박살나 사방으로 파편이 튀듯 소망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제 모양을 잃고 흩어진다. 내 기대와 다른 주변의 반응을 만날 때 이런 감정이 쉽게 마음의 문턱을 넘어온다. 뭔가를 요청했는데 거절당하거나, 내가 배려한 것을 알아주기는커녕 되레 양보했다는 식의 반응을 만날 때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를 고양시키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특정한 조건이 되면 그것들이 전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내가 가졌던 기쁨을 빼앗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 생각대로 풀리길 기대하며 했던 행동 때문이다. 내 마음을 잘 정리하고 방향을 찾아 달리게 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타인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 것이 문제의 원흉이었는지 모르겠다. 모처럼 마음이 활기를 얻을 때, 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비슷한 기대를 했을 수도 있겠다. 한편 내가 했던 말이 평소보다 과했을까도 돌아본다. 들뜬 마음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편한 대로 행동한 탓은 없는지도 톺아본다. 이 모든 것이 실망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진짜 원인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 있었다. 이를테면 타인의 반응이란 그릇에 실망감이 담겨 내게 건네졌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 내 것처럼 느끼고 힘들어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모든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인지, 혹은 그 날따라 힘들고 어려운 일로 인해 마음이 어려운 것인지, 또 몸이 힘들어 유쾌하거나 호의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것인지는 그 순간에 알 길이 없다. 그저 상대편의 표정, 목소리, 억양, 말투, 내용 등을 통해 내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그 감정을 견디지 못할뿐더러 스스로 더욱 비관하기 쉽다.
어쨌든 내 감정은 내가 선택했다. 상대의 반응과 크게 상관없다. 상대방이 울고 있어도 그것이 TV 개그 프로그램의 일부분이라면 웃고 기분 좋을 수 있듯, 상황을 해석하는 내 인식에 감정이 달려 있다. 내가 유난히 기분이 좋을 때 이런 인식이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여건만 주어지지 않는다.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누구나 그렇지 않은 것을 안다. 나 또한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내가 원치 않은 말과 행동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결국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하는 몫이었다.
옷매무새를 만지듯 내 마음을 단정하게 한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다시 바라보고 내 인식이 편향되지 않았나 살핀다. 그러는 사이 실망감이 만든 내면의 풍랑이 잠잠해진다. 멋쩍게 기지개를 켜며 다시 낙관적인 시야를 취한다. 방금 전까지 내 안을 어지럽게 한 회오리의 흔적에서 눈길을 거둔 후 이내 다시 바라볼 곳으로 눈을 돌린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에 시선을 두는 것이다. 난 또 부지불식간에 실망감을 초청할 것이다. 그렇게 할 만큼 어려운 상황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을 꺼내보며 나를 돌아보면 좋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제 생각의 선이 분명해진 덕분입니다.
때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